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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헌 Jul 31. 2024

내가 있는 한 절대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할거야

공포는 새로운 숙주를 찾아 다닌다

  스트레스에 주목하는 이유는 스트레스야 말로 감정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며, 좋은 생각을 방해하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물론 적절한 스트레스는 우리 삶에 필요하다. 또한 고강도 스트레스라도 어느 정도는 우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큰 충격을 동반한 심각한 스트레스는 지워지지 않고 기억 속에 계속 남는데, 그 이유는 이 상황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계대상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트라우마의 기억은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우리의 뇌(좌뇌 강아지)는 '만일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발생하면 기억을 활성화시켜 경고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한다. 이러한 일이 또다시 일어나면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언제든 "비상상황이야!"라고 소리칠 준비를 항상 해 놓는 것이다. 그것이 좌뇌 강아지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트라우마를 그 어떤 기억보다 중요하게 간직하고 있다. 만일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발생했다고 좌뇌 강아지가 판단을 하면 우리 몸은 즉시 전시 상태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피는 못 속인다이것은 누구의 감정인가?     


  그렇다면 혹시 나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는 걸까? 장담하는 데 100%의 확률로 존재한다. 가능성이 높은 것도 아니고 무조건 존재한다. 이렇게까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트라우마는 후대로 유전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조상들로부터 트라우마를 물려받는다. 우리 뇌는 트라우마를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기억으로 보호하기 때문에 이는 DNA에 각인된 채 후대에까지 전달된다. 예를 들어 현대인들은 뱀에게 물려 죽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자동차 사고로 많이 죽는다. 하지만 자동차를 보고는 아무런 겁도 내지 않지만 뱀을 보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데, 이는 우리에게 전달된 트라우마의 기억 때문이다. 뱀을 보면 무조건 빨리 도망가라는 메시지를 조상들이 전달해 주는 것이다. (개인적인 사고로 인해 자동차 트라우마가 있을 수는 있지만, 이것은 아직 뱀처럼 인류 보편적 트라우마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는 조상들의 트라우마가 존재한다. 먼 고대의 조상뿐만 아니라, 부모, 할아버지, 할머니의 트라우마가 내 안에서 재활성화 될 수 있다는 소리다. 


  트라우마 유전분야의 선구자이자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의 저자 마크 월린은 “가족들의 공포는 새로운 숙주를 찾아다닌다”고 표현했다. 트라우마는 그것을 겪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후손을 찾아간다. 


  실제로 많은 과학자들은 트라우마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유전되는 수많은 증거를 밝혀냈다. 부모나 조부모의 상처와 고통의 유전자가 경험한 적이 없는 자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트라우마를 물려받은 자식들이 영문도 모른 채 고통을 겪는 너무도 많은 사례들이 있다.


-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한 할머니의 손녀는 극심한 불안 장애를 동반한 조울증과 자살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을 증발시키겠다거나, 내 몸은 몇 초 안에 소각될 거라는 알아듣기 힘든 말을 했다.     


- 9·11 테러를 겪은 사람의 자녀는 코르티솔 수치가 낮게 나오는데, 이 수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비롯해 스트레스 정신 질환과 관련이 있다.     


- 삼촌이 있었는지도 몰랐던 조카는 어느날 공포를 동반한 불면증이 찾아왔다. 잠들면 다시 깨어나지 못할거라는 공포와 몸이 얼어붙는 추위가 느껴졌다. 그녀의 삼촌은 폭설이 내리던 날 송전선을 점검하던 중 동사했다.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 중에서)     


- 6·25전쟁 때 특수 부대원이었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오랫동안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알콜중독으로 죽었는데, 전쟁 후 한참 뒤에 태어난 딸이 아버지가 껶었던 전쟁 때의 꿈을 반복해서 꾸었고, 영문도 모르고 오랫동안 마음의 고통을 겪었다. 

(‘며느리 사표’ 중에서)     



  세계적 라이프 코치인 로렌 헨델 젠더는 “사람들의 삶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 반복성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중독자 부모를 극복하고자 하는 아이들은 술을 멀리하지만 자라서 사회에 나가 여전히 자기 부모나 조부모와 똑같은 문제에 맞닥뜨리는 것을 보아왔다는 것이다.


  신체 뿐만 아니라 감정도 되물림 된다. 부모의 트라우마가 그대로 아이에게 이어지면 행동이나 정서에 부모의 문제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이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은 그래서 유효하다.      


  우리는 의도와 다르게 행동한다     


  물려받지 않더라도 나의 삶에서 트라우마가 생성되기도 한다. 아기가 죽거나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했거나, 부모님의 부부 싸움 등은 큰 충격적 사건으로 우리의 트라우마를 형성한다. 그런데 트라우마는 어릴 적 느꼈던, 어른이 보기에는 아주 사소한 일에 의해서도 생길 수 있다. 심지어 엄마가 언니에게는 주고, 자기에게는 주지 않았던 아이스캔디에 의해서도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트라우마 기억들이 다시 활성화될 때는 사건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현재 성인의 상태가 아닌 트라우마 발생 당시의 (5살 혹은 10살짜리 아이) 수준에서 작동한다.


  그래서 좌뇌 강아지가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다고 판단을 해버리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나고, 기분이 나쁘고, 하기 싫고 짜증이 나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지만 자신이 왜 그러는지, 기분이 왜 이렇게 나쁜지 이성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자동적으로 나오는 모든 반응을 현재 상황 때문이라고만 생각한다. 이것이 보통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는 ‘성격’이 된다. 



  그래서 트라우마를 마주 보지 않으면, 인생을 생각대로 살 수 있다는 건 착각이다. 우리는 의도와 다르게 행동한다. 좌뇌의 강아지가 자신이 버림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멋진 데이트를 하고도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상대를 떠나게 된다. 나도 모르는 감정으로 인해 아기를 가진 엄마는 자신이 아이를 다치게 할까봐 안절부절 하며, 스무 살 청년은 항상 죽을까봐 걱정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폄하하거나 자신은 불행하다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트라우마가 작동하면 이성은 마비된다. 반복하지만 이성과 감정의 싸움에는 언제나 감정이 승리한다. 그러한 트라우마의 기억이 우리 안에 수백 가지나 존재한다. 그것을 물려받았던, 내가 만들었던, 크던, 작던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 대부분의 인간은 회복 탄력성 때문에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감정의 정체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인생은 자신과의 싸움'이며,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결국 내 감정의 근원을 알아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감정을 바꾸고 기분을 바꿔야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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