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집안일을 마치고 공원길로 이어지는 길로 나오니 가을 햇살이 찬란하게 부서진다. 가족끼리 산책하는 사람들, 어린 아들과 축구하는 젊은 아빠 그리고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모습을 바라보면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앳된 얼굴의 엄마들. 편안한 얼굴에 오가는 대화가 정답다.
다행히도 우리 동네엔 아직 아이들이 많다. 일요일이라 더욱 많은 아이들이 새 모래가 충분하게 깔린 놀이터로 모여든다. 기존의 갈색 모래 위에 하얀 모래를 몇 톤쯤 실어다 부은 후 넓게 펴서 놀이터 바닥은 가을햇살에 하얗게 빛나고 있다. 아름답다. 이런 모습을 한 참 바라보며 걷다 보면 우리 아이들이 어릴 적 그 놀이터에서 밤새 땅을 파고 물을 길어다 부으며 댐과 강을 만들어 나뭇잎 배를 띄우던 때가 생각난다. 저녁도 굶고 놀이에 빠져있던 아이들 머리 위로 둥그렇게 보름달이 떠올랐을 때 무언지 모를 가슴 가득 차오르던 감정, 그것이 삶의 충만함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한 그루 나무 앞에 선다.
"이 나무 좀 봐. 붉은 단풍이 너무나 위풍당당하다."
"이름이 뭐였더라?"
"대왕참나무네. 봐봐 이름표 달고 있잖아."
옆지기와 한 참을 서서 따사로운 가을햇살 속 대왕참나무의 모습을 바라본다. 초록빛일 때는 몰랐던 붉게 물들어 가는 나뭇잎은 우아하고 화려하다. 당당하고 찬란하다. 콘크리트로 막힌 길 사이사이에 서 있는 대왕참나무는 자세히 보니 나무 꼭대기엔 나뭇잎이 없다.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있다.
"이 나무가 숲에 있다면 얼마나 자연스럽게 거대하게 자라날까?"
"옮겨주고 싶어?"
"웅, 옮겨주고 싶어. 그리고 그 숲의 산장지기로 살고 싶어."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네."
"봄의 생동하는 숲, 여름비 내리는 숲, 그리고 가을의 곱게 단풍 드는 숲"
"그중에 제일은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고즈넉한 숲이지."
우리는 다행히도 둘 다 자연친화적이다. 나무 한 그루를 보며 이렇게 서로의 생각을 주거니 받거니 할 수 있다는 것은 산책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햇살이 비칠 때 보니 우리의 모습에도 이제 단풍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듯하다. 어느덧 아이들은 모두 우리 보다 키가 커졌고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키가 작은 사람이 되어 있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맹렬하게 성장한 후 곱게 물들어 떨어져 흙이 되는 과정일까? 수많은 길을 걸으며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돌아보고 들여다보는 과정일까?'
이제 발걸음을 옮긴다. 플라타너스 큰 잎이 바닥에 뒹군다. 밟을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경쾌하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보았던 김현승 시인의 '플라타너스'라는 시가 왜 그 순간 떠 올랐을까?
플라타너스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론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너를 지켜 오직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窓)이 열린 길이다.
아마도 중학교 때였을 거 같다.
눈만 뜨면 책을 보던 그때 국어시간에 배운 '플라타너스'라는 시는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바로 이 구절 때문에 내 마음속으로 쏙 들어왔다. 어린 나이에
시속의 화자가 플라타너스를 힘들고 외로울 때 묵묵히 함께 걸어주는 벗으로 그린 것 같아 좋았고 내 인생에 그런 날에도 플라타너스 같은 누군가가 옆에서 나와 함께 걸을 거야라고 위로받았던 거 같다.
"그때부터였던 거 같아. 플라타너스를 보면 예사로 보이지 않아. 내 친구 같고 내 편 같아."
"그래서 플라타너스 잎이 떨어진 길을 그냥 못 지나 치는 건가?"
"그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좋아서 그런 건데. 플라타너스 잎을 밟을 때도 항상 이 시가 생각나."
어느덧 우리는 숲으로 들어서고 있다. 2024년 우리 동네의 11월 초의 숲은 아직 초록이 더 많지만 바닥에 떨어진 노랗고 붉은 벚나무 잎과 이미 퇴색한 낙엽은 여름과 가을이 공존하는 듯한 오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발바닥에 폭신하게 밟히는 낙엽. 뒤늦게 익어 떨어지는 도토리. 이미 홍시가 되어 새들이 밥이 된 감들. 나름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오후의 햇살은 두 손을 받아 모으고 싶을 만큼 소중하게 여겨진다.
이 숲 속에는 여섯 개의 벤치가 있다. 벤치는 세 개씩 가깝게 배치되어 있는데 나뭇잎들이 우리보다 일찍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나는 나뭇잎을 살짝 옆으로 치우고 앉는다. 그리고 편안하게 앉아 오는 길에 사 온 커피와 음료를 마신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본다. 푸른 하늘에 흰 물감을 손바닥으로 비벼놓은 듯 회화적이다. 따뜻한 커피의 향기와 숲의 낙엽 냄새가 무언가 비슷하다. 마음이 푸근해진다.
등을 따뜻하게 비추어주던 햇살이 조금씩 위치를 바꾼다. 숲은 빛이 이동하면서 조금씩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청설모가 바쁘게 도토리를 나르고 이름 모를 작은 새들이 지저귄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쉰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두 발로 걸어서 양팔을 씩씩하게 앞뒤로 내저으며 우리는 가을숲을 통과한다.
'내가 가을숲을 통과하는 것인가?
가을숲이 나를 통과하는 것인가?'
이 표현은 나의 둘째 아이의 표현을 빌어본 것이다.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 호수에 물결이 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물이 흐르는 것인가?
내가 흐르는 것인가?'
그때 나는 이 아이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 신비감을 갖게 되었다. 이건 장자를 읽은 사람에게서나 나올법한 표현인데 이 아이는 벌써 다 알고 이 세상에 온 걸까 경외감마저 들었었다.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니 발바닥이 따뜻해진다. 온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작은 숲이 주는 충만함과 오르락내리락 경사가 있는 길이 걷기에 즐거움을 더해 준다.
일교차가 큰 날씨는 다디단 과일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향기가 진한 꽃을 피워낸다. 걷기의 마지막은 늘 향긋한 꽃을 보고 향기를 음미하고 그 자그마한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한 해 한 해 걸으며 느끼는 것들을 한 마디로 말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자연에서 온 것이 맞아요.
그리고 아주 비슷한 성분으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왜냐고요?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잖아요."
2024년 11월 3일 오늘도 저는 행복하게 잘 걸었습니다.
여러분은 요즘 어떤 길을 걷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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