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동안 정성을 들인 원고를 6차 수정을 거쳐 출판사에 보내고 조금은 후련하고 조금은 헛헛한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11월의 날씨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포근함. 춤을 추듯 내려오는 물든 나뭇잎들 속을 걷는다. 겉옷을 벗어든 사람들. 손에 커피를 한 잔씩 들고 낙엽길을 즐기는 모습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공간을 걸으며 저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내일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의 밝은 얼굴에 긴장감이 감돈다. 언제나 포근하던 날씨가 수능날에는 꽁꽁 얼어붙는데 내일은 과연 어떨지 걱정이 된다. 동일한 빛깔의 꿈을 갖도록 강요받는 교육 시스템, 눈부시게 자유롭고 아름다운 청소년 시절 책상에 묶인 하루하루가 안타깝다.
아이들이 무지개빛깔 꿈을 꾸는 사회를 만들어주어야 해.
자박자박 발걸음은 내 안의 나에게 말을 걷고 대답을 한다. 대왕참나무가 가을빛에 주황빛으로 눈부시다. 떨어진 잎도 당당한 대왕참나무. 묘하게 매력적이다.
'오후 4시의 상수리나무숲'이라는 소설을 구상 중이다. 오롯이 오후 4시의 가을숲이 주는 고즈넉함과 빛나는 햇살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떤 인물이 어떤 이야기를 품고 세상에 나올지 얼마나 더 생각의 눈덩이를 굴려야 생생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쉼 없이 마음 안에서 이야기를 이렇게 저렇게 만드는 중이다. 저절로 인물들이 연결되고 사건이 싹트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밤에 꿈을 꾸었다. 아이를 낳는 꿈이다. 토실토실하고 건강한 남자아이를 낳아 집으로 가는 꿈. 아이와 함께 웃고 품에 안고 행복해하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결혼하고 두 명의 사내아이를 수중분만으로 낳았다. 아이를 낳는 일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어리고 깡말랐던 내가 아이의 탄생을 깃점으로 얼마나 단단하고 용맹해지는지를 생생하게 경험하였다.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대기가 온통 따스하고 충만한 느낌으로 가득해진다.
우리 동네 붉은 단풍 구간으로 들어선다.
노랗게 물드는 느티나무 덕에 단풍나무는 더 화려하게 불탄다. 새들이 지저귄다. 숲에 들어서면 뇌파가 평온하게 조율된다. 이어폰을 빼고 음악을 끄고 바람소리와 물소리를 듣는다. 물이란 얼마나 오묘하던가. 어디서 와서 이렇게 흘러가는 것일까. 공기 중에 떠 있다가 구름으로 모인 물방울들이 비가 되어 내리고 시내를 강을 타고 이렇게 흘러온 것인가.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작은 새들이 고운 나뭇잎 사이를 장난스레 날아다닌다.
발바닥에 닿는 떨어진 낙엽이불이 폭신하다.
이 고운빛은 어디서 와서 여기 이렇게 떨어지는가?
내 발끝에 닿은 빨강
내 어깨에 앉은 노랑
내 손을 잡는 빨강
가을숲에서
나도 샛노랗게 웃다가
붉게 물든다
이곳에서 나는 한참을 머문다. 아름답다.
아무도 없는 숲의 고요
물소리와 작은 새의 노래만이 이곳이 살아있음을 말한다.
빈 벤치 위로 나뭇잎이 떨어진다. 사람들이 걸어 꼬불꼬불 닦인 길 위로 눈이 쌓이듯 노랗고 빨간 잎들이 쌓인다. 먼저 간 이의 발자국을 감추려는 듯 소복소복 쌓이는 단풍잎들.
삶은 때때로 선물 같아. 몹시 힘들고 허전한 날에 눈이나 비, 단풍이나 노을로 위로를 건넨다. 앙상하게 마른 노인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걷는다.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몇 걸음 걷다가 멈추어 서고 다시 몇 걸음을 걷는다. 햇살이 따스해서 다행이다.
출장길에 낯선 동네 나선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가 있다. 올해 여름 언저리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 오징어볶음 1인분만 줘요. 공깃밥은 두 개 주고요."
다정해 보이는 노부부가 들어와 밝은 얼굴로 말한다. 주인장은 밝게 인사하며 1인분의 오징어 볶음을 넉넉하게 담아 밥상을 차려드린다. 그리고 뭐 더 드시겠냐고도 묻는다. 오가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날마다 점심을 나와서 드시는 모양새다. 나이가 들면 소화능력도 약해지고 젊었을 적의 1인분은 너무 많은 양인가 보다. 두 분이서 사이좋게 식사하시며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가 좋았다.
요즘은 걸으며 '걷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머릿속으로 꿈꾸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지금, 바로 여기서 걷고 있는 나에게 집중한다. 그러면서 자연을 느끼고 발끝의 감각을 생생하게 경험한다.
오늘은 가을빛에 찬란한 나무들이 주인공이다. 햇살과 바람과 발끝에서 부서지는 나뭇잎들의 소리를 들으며 순환하는 삶을 생각한다. 노란 단풍 구간에선 나도 노랑이 되고 붉은 단풍 구간에선 나도 빨강이 된다.
걸으면 새로운 생각들이 싹튼다. 해보고 싶은 근사한 일. 가보고 싶은 곳. 사람들과의 새로운 모임... 멈추었을 때 여기저기 고이던 걱정과 근심, 불만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과 희망의 싹이 새로 나온다. 걸으며 돋아난 싹은 마음속에 숨어 있던 나 자신에 대한 기대인 것일까?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그의 자서전 <시와 진실>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소망이란 우리들 속에 있는 능력의 예감이다."
“Unsere Wünsche sind die Vorahnungen der Fähigkeiten, die in uns liegen.”
부지런히 걸으며 마음속에서 뒹굴거리는 소망들을 잘 다듬어 하나씩 하나씩 실천해 보아야겠다. 근심은 사라지고 새로운 소망이 자라는 걷기, 오늘도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