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역에서 경희대 서울캠까지 3km
2024년 11월 11일 오전에 중랑구에서 영유아교육기관에서 컨설팅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12시다. 가까운 카페로 자리를 옮겨 문서를 정리하면서 간단하게 잉글리시머핀과 카푸치노 한 잔으로 점심을 대신한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창문 가득 노랗게 물들어 가는 은행나무가 보인다.
이제 1시. 영유아교육 과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선생님과 어떻게 하면 아이가 배움을 주도할 수 있도록 놀이지원을 할 것인지 원격으로 지원한다. 선생님은 평소 궁금한 점들을 문의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함께 찾고 조언을 한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교육에선 아이들을 존중하는 교사가 희망이다. 점심시간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쉼터가 나에게는 때때로 업무공간이 된다.
나는 카페에 오면 늘 통창으로 나무가 그득하게 들어오는 탁 트인 밝은 곳에 앉는다. 햇살과 바람,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잘 보이는 곳, 도로로 지나는 버스와 자동차, 오토바이가 강물처럼 평화롭게 흘러간다. 책을 보고 선생님들의 어려움을 어떻게 지원할까 자주 묻는 질문을 정리하고 분석한다. 남은 시간은 과제를 채점하거나 수업준비를 한다. 가끔 창밖을 보니 작은 바람에도 춤을 추듯 떨어지는 은행잎이 장관이다. 일하며 만끽하는 가을이 참 좋다.
오후 4시다. 예상보다 조금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도를 보니 중랑역에서 경희대 서울캠퍼스까지 3km 정도이다. 운동화 끈을 조이고 걸어가 보기로 한다. 노트북에 몇 권의 책까지 들어있는 백팩이 조금은 부담스럽지만 오후의 신선한 바람이 걷기를 재촉한다.
길은 중랑역에서 회기역 방향으로 쭉 이어진 일직선 구간이 제법 길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가로수로 심어진 은행나무가 저녁햇살에 반짝인다. 건물 사이로 잠깐 보이던 햇살이 이제 소멸 전 온 힘을 다하여 빛을 내는 듯 찬란하게 빛나고 은행나무는 이 빛을 모두 빨아들여 더 노랗게 변신하려는 듯 햇살 속에서 몸부림친다. 교통기관으로 이동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도시의 거리를 두 발로 걸으며 바라본다. 나무와 차와 다양한 분위기의 사람들의 모습을 찬란한 빛이 감싸 안은 듯 느껴진다.
작고 작은 사람들은 두 발로 안정적으로 걷는 신기한 생명체다. 은행나무는 언제까지 이 지구에 살아있을까?
빛을 따라 움직이며 그림을 그린 클로드 모네는 어떤 것을 보고 어떤 것을 가슴에 담았을까? 시간과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의 느낌과 효과를 그림에 담으며 빛이 만들어 내는 세상의 모습에 감탄하지 않았을까? 지는 해를 바라보며 걷는 길에서 내내 빛에 대해 생각한다.
'클로드 모네는 여러 버전의 건초더미를 그렸는데 동일한 장소에서 다른 시간대와 다른 계절에 변화하는 빛을 포착하기 위함이었다지. 이 연작 그림 건초더미 (Haystacks) 시리즈 중 나는 해 질 녘의 건초더미를 제일 좋아해. 왜 그럴까? 해 질 녘의 빛이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위로 같아서일까?'
"내 생각엔 하나의 풍경이란 그것을 둘러싼 대기와 빛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모네의 말을 떠올리며 걷는다. 빛을 따라가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거리를 바라보며 걸으니 그의 말이 더욱 생생하게 들려온다. 평생 빛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피사체를 연구한 화가. 그의 호기심과 집념이 경이롭다. 2024년 11월 11일의 서울. 손을 잡은 연인들이 정답게 걷는다. 가방을 멘 학생들의 대화가 활기차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과는 너무나 다른 평온함을 가을날의 저녁 햇살과 은행나무가 만들어낸다.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 정리하는 곳을 지난다. 플라스틱, 빈 유리병과 종이, 비닐 등 거대한 쓰레기 더미가 열린 문 너머로 보인다. 용기를 들고 다녀야 한다. 모든 지구별 사람들이! 쓰레기가 심각하다.
그곳에 언제부터 있었을까? 커다란 벽오동나무. 멀리서도 넓적한 이파리가 보인다. 그 재활용 창고 앞에 가을햇살을 담뿍 받은 보랏빛 아스타가 아름답다. 화분에 심은 화초와는 다른 생동감이 땅에 직접 뿌리를 내린 국화에서 느껴진다. 고철들과 찌그러진 플라스틱과 대비를 이루며 생명의 아름다움이 더욱 귀하고 애잔하다.
조금 더 걸음을 옮긴다. 중랑천 위에서 흐르는 냇물을 바라본다. 황금빛 시내다. 중랑천에 이는 반짝이는 물결을 보며 천변을 달리는 사람의 가벼운 발걸음이 경쾌하다. 흐르는 물은 오늘도 생명을 실어 나른다.
한참을 걷다가 이제 오른쪽으로 길을 건너려 횡단보도 앞에 선다. 거대한 왕국처럼 생긴 웨딩건물 앞으로 부지런히 걷는다. 회기역이 보이고 그 앞에 잉어빵, 호떡, 십원빵을 파는 상인들이 눈에 들어오면 이제 우리 동네에 들어온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구멍이 송송 뚫린 작은 바구니에 네 개씩 들어있는 홍시가 정겹다.
이제 저녁의 태양은 사력을 다하여 빛나다가 점점 기울고 어스름한 어둠과 잠시 함께 하다가 검은 밤에게 완전히 자리를 내어 준다. 불빛이 하나 둘 켜진다. 학교로 가는 길은 온통 은행나무의 향연이다. 어디를 보아도 은행나무와 은행잎이다.
오늘 내가 찬란하게 기우는 해를 보며 걸어온 3km는 ‘찬란한 석양과 은행나무와 함께 걸은 길’이라고 정리하고 이 글을 맺는다.
'눈부신 11월의 은행나무야, 네가 보는 거리와 네가 만나는 태양을 함께 해서 즐거웠어. 40분간의 행복한 걷기를 나는 오랫동안 기억할게.'
황금빛 은행나무 길을 걸으며 가을이 내 몸에 스며들어 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