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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정 Nov 10. 2024

가을길을 홀로 걷는 즐거움

가을아침 2024.11.09



[가을햇살 그리고 커튼]

햇살이 베이지색 커튼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밤새 썰렁했던 창에 따사로운 햇볕이 눈부시게 빛나는 아침.

왜 가을아침이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햇살이 너무 아까워. 어떤 신기한 주머니가 있다면 이 햇볕을 모았다가 시린 바람이 부는 겨울날 작은 방에 살그머니 쏟아놓고 싶어. '


어릴 적부터 이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저 따사로운 빛은 어디서 오는 걸까. 먼 우주공간을 지나 마침내 나에게 쏟아지는 빛. 그리고 어떤 따사로움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가장 깊은 곳의 슬픔까지 녹여낼 듯한 감싸 안아주는 듯한 따뜻함......


[찬 겨울, 따뜻한 우리집]

나는 어릴 적 눈보라가 치는 겨울에도 주로 밖에 나가서 놀던 아이였다. 볼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과 눈, 처마밑에서 꽁꽁 얼면서도 조금씩 자라나는 고드름. 마당과 살구나무 사이에 서면 가장 세게 몰아치던 눈보라. 이런 것들이 좋았다. 거친 날씨에도 썰매를 들고 씩씩하게 빙판을 찾아다니거나 쌓인 눈으로 요새를 만들어 놀았다. 볼이 온통 발그레한 채로 한참을 놀다가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나면 그제야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에는 항상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나 아궁이에 구운 따끈한 군고구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기예방을 위해 마늘까지 구워주신 덕분에 우리들은 겨울에도 씩씩하게 놀 수 있었나 보다.


[낡은 운동화]

아침을 먹을까 하다가 그냥 운동화를 신는다. 신발장에 살펴보니 운동화가 다섯 켤레나 된다. 나는 일 년에 한 켤레의 운동화를 새로 장만한다. 그만큼 부지런히 걸었다는 증거라 뿌듯하기도 하다. 해가 더 높아지기 전에 부지런히 걸어볼 요량이다. 현관문을 열고 아파트 단지를 나와 몇 걸음 걸으면 노랗게 빨갛게 떨어지는 나뭇잎을 즐기며 걸을 수 있다. 


공원길로 들어선다. 코끝에 스치는 진한 나뭇잎들의 향기. 꽃도 냄새가 좋지만 잘 물들어 떨어진 가을 나뭇잎들의 냄새가 이렇게 그윽할 수 있다니 신기하다. 잘 로스팅된 원두의 냄새가 잠깐 생각난다. 


아, 가을의 냄새!


대왕참나무의 붉은 잎새 사이로 노란 햇살이 눈부시다. 떨어지는 잎들을 모아 왕관을 만들어 쓰면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여왕의 자태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샛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보는 일. 이제는 너무나 귀한 경험이 되었다. 예전처럼 은행잎이 거리를 온통 노랗게 물들이는 일은 기대하기 어렵겠다. 찬 기온에 초록에서 갑자기 빛을 잃은 나뭇잎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냥 그저 그런 노란빛의 은행잎. 바닥에 으깨진 은행열매의 냄새와 은행잎의 냄새가 뒤섞인 구간을 요리조리 골라 발을 딛으며 빠른 걸음으로 지난다.


[들국화 구간]

이제 낮은 산의 언덕을 오른다. 아직 들국화는 바람결에 진한 향기를 날리며 차가운 밤에 떤 몸을 가을볕에 녹이고 있다. 사랑스럽고 사랑스럽고 고운 나의 들국화. 축대를 쌓은 돌 사이에도 한 두 줄기 자라난 들국화. 공원 한쪽에 소담하게 피어있는 들국화. 들국화 구간을 걸을 때는 즐거웠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꽃이 지기 전에 자주 보러 가야지.

그 고운 얼굴에 눈 맞추러.


[호숫길]

호수를 크게 한 바퀴 돈다. 가을이 되어 좋은 점은 아름다운 숲길로 걷기 좋다는 것이다. 벚나무는 꽃도 곱지만 단풍 든 모습도 멋지다. 봄에 흐드러져 눈처럼 쏟아져 내리던 꽃길이 이제 가을을 닮은 옐로의 다양한 채도를 가진 잎들의 춤으로 너울 거린다. 이문세를 듣는다. 좋다.


[메타길]

어느덧 메타세쿼이아가 늘어선 길로 들어선다. 맨발로 걷는 사람들. 찬 날씨에도 씩씩하다. 나도 맨발로 걸어볼까 하다가 감기기운이 약간 느껴져 오늘은 참기로 한다. 가을을 보랏빛으로 물들이던 맥문동은 이제 까만 진주알 닮은 씨앗을 달고 아침 햇살에 자랑스럽게 빛나고 있다. 빨간 머리 앤이 이 장면을 보았다면 그 맑은 눈을 반짝이며 손짓발짓 하며 감탄했겠지.


"오~~ 보랏빛 꽃의 여왕님이여~어디로 가셨나요? 이 까만 진주는 저에게 남겨주신 선물인가요? 그렇다면 제가 이 진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여왕님의 분부에 따라 백성들을 위한 잔치를 준비하겠나이다~~."


그 아름다웠던 길이 이제는 쇠잔한 여왕의 뜰을 걷는 기분으로 걷고 있다. 그래도 매력적인 흑진주 닮은 씨앗이 햇살에 반짝일 때마다 눈이 즐거웁다. 발끝에 밟히는 도토리 몇 알도 귀엽고 반갑다. 도토리나무 숲에는 바스락바스락 흙이 되어가는 빛을 잃은 도토리나무의 잎들을 밟는다. 내 발 끝에서 바스러지는 여린 잎들. 바람에 날리고 잘게 부서져 땅으로 돌아간다. 다시 나무들의 거름이 되어간다. 우리가 자녀를 낳고 키우며 그들의 거름이 되어가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할까?


[도서관 길]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이제 도서관 옆 산길로 접어든다. 가을숲의 침엽수림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황톳길을 걸어간다. 나뭇잎이 떨어진다. 강아지가 지나간다. 나이 든 노부부가 지팡이에 의지하여 걷다가 전방에 낡은 벤치를 발견하고 미소를 짓는다. 또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 아주 큰 맹견이다. 사람과 산책하는 사람보다 반려견과 산책하는 사람이 많다. 


[작은 절 구간]

이제 작은 절을 지난다. 어여쁘던 참취꽃이 찬 바람에 시들고 두 손을 모은 부처님의 미소가 가을햇살 속에 더욱 자애롭게 느껴진다. 손을 모은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옷깃을 여미고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하는 시간.


오늘 아침도 두 시간을 충만하게 잘 걸었다. 동네공원에서 출발하여 호수를 지나 상수리나무숲 그리고 도서관 옆길을 거쳐 황톳길로 해서 작은 절에서 쉼표를 찍고 다시 우리 동네로 들어온다. 


체중이 많이 늘어난 나를 지탱하는 나의 작은 발에게 미안해지는 요즘. 이제 너의 수고를 좀 덜어주어야 할 거 같아. 날마다 부지런히 걸어야 겠다. 아니, 걸어야 산다.


가을길을 혼자 걷는 저자, 2024년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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