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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Apr 06. 2020

한 작가 읽기: 서머싯 몸

재미졌던 서머싯 몸 읽기를 끝내며

언젠가 독서광이라 자칭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책을 추천해 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럴 때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을 잘 가다듬은 언어로 알려주곤 했다. 그중에서 한 두 권쯤은 읽었겠지만, 대개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마음 한 구석에 아로새긴 후 다른 다짐으로 덧칠하곤 했다. 열의는 있었지만, 추진력을 갖추지 못한 게 흠이었다. 


나 같은 사람을 수없이 만나서일까. 한 교수님께선 책 추천을 공허한 외침쯤으로 여기듯 의미 없는 일이라 선언했다. 중요한 건 자기와 맞는 작가를 찾는 일이라는 첨언과 함께. 여러 사람이 쓴 책을 주루룩 읽어 봤자, 뒤죽박죽될 뿐이라는 의미였던 듯하다. 그는 최근 읽은 책이라도 알려주라는 극성에 마지못해 휴가 때 읽었던 인상적인 책을 몇 권 소개했다. 나는 어느 종이 한 구석에 그 리스트를 깨작깨작 써넣었다. 어수선한 책장인지 졸업한 학교 동아리방 어디쯤에 두고 온 파일인지. 그 종이의 행방과 책들이 무엇이었는지 흐릿하지만, 적어도 그 교수님께 배운 게 하나 있다. 한 작가를 파헤치는 일이다.


나름 책 좀 읽었다고 자부했지만, 누군가 좋아하는 작가를 물었을 때 우물쭈물한 이유는 멀리 있지 않았다. 누군가를 여러 번 읽은 적이 없었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라는 무의미한 자책은 접어두고, 가즈오 이시구로란 작가를 탐독했다. 당시 노벨상을 막 수상한 작가였기에 여기저기서 홍보에 열을 올렸고, 그 책들이 실제로 흥미롭기도 했다. <녹턴>을 필두로 <나를 보내지 마>, <남아 있는 나날>까지 금세 읽었다. 그러다 서머싯 몸으로 갈아탔다. 이유는 간단했다. <남아 있는 나날>까지 읽고 개인 사정으로 독서 휴지기에 들어갔는데, 그새 내가 '한 작가 읽기 운동'을 하고 있다는 걸 잊었기 때문이다. 간혹 발동하는 추진력은 틈이 있어선 안 됐다.




본격적으로 서머싯 몸을 읽겠다고 마음먹은 건 <면도날> 이후였다. 일전에 <달과 6펜스>를 짱짱맨하면서 읽었던 것도 있었고, 인생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끊임없이 방황하는 <면도날>의 래리가 좋았다. 나는 그렇게까지 방황의 갈래를 나누진 못할 것 같은데, 그가 대신 내 빈곤한 욕구를 충족시켜줬기 때문일까. 두 책을 관통하는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고민과 몸 형이 그 답을 찾아내는 과정이 좋았다. 


이후 서머싯 몸의 책을 읽을 때마다 비슷한 주제와 메시지를 서로 다른 인물과 이야기로 전달하려는 인상을 받았다. <면도날>의 신사 래리, <인간의 굴레에서>의 못난 구석을 지녔던 필립, <인생의 베일>의 철부지 키티처럼. 그들은 서로 다른 삶을 부여받았고 그 역할에 따라 다채로운 궤적을 그렸지만, 몸 형이 말하는 인생을 그리는 것엔 하나의 역할을 해냈다. 그게 의도한 바든 아니든 그걸 깨달은 순간, 몸 형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 깨달음 비슷한 것이 한 작가를 읽어야 하는 이유일까. 나는 감히 그렇다고 말하겠다.


말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어. 표현하려고 하면 혼란스럽기만 하고. 어떤 땐 이런 생각이 들어. '이런 것 저런 것을 고민하는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내가 거만하고 몹쓸 인간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나도 남들 가는 길을 가면서 그럭저럭 세상사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말이야. 하지만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쌩쌩하던 녀석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있던 게 떠올라. 그러면 모든 게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무의미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산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삶이란 눈먼 운명의 신이 만들어 낸 비극적인 실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면도날, p. 127, 이하 모두 전자책 ver.) 


<면도날> 속 래리의 자기고백 파트다. 전우의 죽음은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만들었다. 그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약혼녀도 두고, 래리는 떠난다. 인생이란 여정이 우리에게 남겨진 이유를 찾기 위해.


도. 우리들 중 누구는 아편에서 그 '길'을 찾기도 하고 누구는 신에게서 찾고, 누구는 위스키에서, 누구는 사랑에서 그걸 찾죠. 모두 같은 길이면서도 아무 곳으로도 통하지 않아요. (인생의 베일, p. 390)


그러나 그것에 대한 답은 없다. 그리고 어디에나 있다. 노자의 '도' 개념이다. 도덕경에 따르면, 진리는 어디에나 있으면서 없다. 진리를 진리라 부르는 순간 진리는 없는 꼴이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흘러가는 게 인생이고, 그것을 멱살 잡고 파헤치는 건 무의미하다.


그는 지금까지 미래만을 염두에 두고 살아왔다. 그래서 현재는 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이상? 그는 의미 없는 삶의 무수한 사실들로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짜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가장 단순한 무늬, 그러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죽음을 맞는 그 무늬가 동시에 가장 완전한 무늬임을 깨닫지 않았던가? 행복에 굴복하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그것은 수많은 승리보다 더 나은 패배였다. (인간의 굴레에서 Part 2, p.861)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여느 인생이든 간에 본연의 무늬가 있는 법이니, 누가 낫네 마네 왈가왈부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무늬가 다르듯 우리의 인생도 그것만의 특색이 있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몸 형의 글을 읽으며 느낀 형이 전하고픈 메시지다.



지금은 단편을 제외하고 서머싯 몸 읽기를 거의 마무리하는 수순이다. 몸 형에 대한 영원한 작별은 아니겠지만, 당분간 그의 글과 멀어질 생각을 하니 아쉬워 나름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1.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하면 대개 떠올릴 소설로, 19세기 망나니 화가 폴 고갱을 모티브로 했다. 증권 중개인 스트릭랜드가 화가가 되겠다고 집을 나선 뒤의 모습을 그렸다. 망나니 짓을 벌이는 주인공을 보면 고구마로 식도를 가득 채운 느낌이 들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쉽게 닿을 수 없는 달나라에서 기꺼이 살고자 하는 그를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서머싯 몸의 주 메시지를 한 데 담은 책이라 생각하며, 그가 자신과 맞는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 책이라고 본다.


2. <면도날>


막말로 <달과 6펜스>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전쟁에서 친구의 죽음을 목도한 래리는 삶에 회의를 느낀다. 그는 방방곡곡 세계를 돌아다니며 인생의 의미를 찾는 데 힘쓴다.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이 성공 가도를 달릴 즈음에 프리랜서 선언을 한다면, <면도날>의 주인공은 어릴 때 프리 선언을 한다. 그래서 주인공과 함께 성장하는 느낌으로 인생을 고민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쫓을 수 있다. <달과 6펜스> 보다 호흡이 길기에 그것을 먼저 읽고 나서 이 책을 접해도 늦지 않다.


3. <인생의 베일>


예쁘지만 경박한 키티가 허영을 딛고 일어서는 이야기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과 전염병이 창궐하는 메이탄푸를 배경으로 한다. 처음 <인생의 베일>을 읽었을 땐, 서머싯 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인생에 대한 고민을 전면배치한 게 아니라 엇갈린 사랑이 글을 전두지휘해서 그런 듯하다. 그러나 되새김질하다 보면, 베일에 가려진 몸 형 특유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기보다 연애 한 스푼 들어간 소설이 좋다면 <면도날> 보다 이것을 먼저 읽는 것도 좋다.


4. <인간의 굴레에서>


다리를 저는 필립이 방황하며 마주한 인간상들을 토대로 인생의 의미를 보여준다. 총 2권이며, 전자책 분량만 해도 1700 페이지다. 다소 호흡이 길어 몸 형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그 끝을 볼 수 있다. <면도날>을 읽었다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뭐랄까 <인간의 굴레에서>의 인물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또 색다르다. 의미는 엇비슷한데, 다가오는 울림의 색깔이 다르다랄까. 앞의 3권이 인상적이었다면, 읽어서 후회는 없을 것이다.


5. <써밍 업>


서머싯 몸의 자서전격 글이다. 앞서 소개한 책들을 다 읽었다면, 저자 후기 느낌으로 읽기 좋다. 문장 쓰는 법, 연극 쓰는 법 등을 다뤘는데, 본인이 생각한 글쓰기 방법과 그가 느낀 바들을 소상히 다뤄 그의 소설들을 랩업하기 좋다. 




나는 완벽하다고 생각된 페이지를 써본 적이 거의 없으며 불만족스러워서 그냥 내팽개친 페이지가 훨씬 많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문장을 더 좋게 만들 수가 없었다. (...) 그리하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쓰지 않는다. 대신 내가 쓸 수 있는 대로 쓴다. (써밍 업, p.82)


어쩌다 보니, 장황하고 줏대 없는 추천글이 됐다. 몸 형의 매력을 조금이나마 전달할 수 있었다면 다행이겠지만,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었는데 그 맛을 잘 표현하지 못한 느낌이랄까. 근사한 광경이 눈앞에 있는데 스마트폰으로 못 담아내는 심정이기도 하다. 서머싯 몸 형도 그랬다니 작은 위안이 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아쉬움은 여전하다. 못 미더운 글 솜씨에 푸념이나 매달아 놓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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