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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 May 22. 2023

상추, 쉽지 않아요

예전 회사에 상추가 있었다. 계기는 지루함이었다. 당시 회사는 아주 고요했다. 신입분들이 올 때마다 "정말 조용하네요"라고 말하다 깜빡 졸정도로 정적이 깊은 곳이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루하겠지만 말수가 적은 나의 성향과 잘 맞았다. 그럼에도 졸음을 참기 어려워 탕비실로 향했다. 한 평이 채 되지 않는, 먼지와 물건이 켜켜이 쌓인 탕비실에는 밖으로 향하는 창이 하나 있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바깥 구경을 했는데, 사실 대부분 건물에 가려져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맞은편 빌라 옥상과 하늘 정도였다. 맞은편 건물 옥상에는 항상 식물이 있었다. 매해 계절마다 꽃과 작물의 종류가 바뀌었지만 대체로 5월쯤에는 고추, 가지, 오이, 토마토, 상추 모종이 있었다. 


매일 오전, 점심, 일정 시간이 되면 집주인이 옥상에 나타나 물을 뿌렸다. 호스로 분사된 물은 햇볕을 받아 반짝이다 땅으로 떨어지며 무지개를 그렸다. 그 장면이 떠올라 지칠 때마다 탕비실로 들어가 몰래 창밖을 염탐했다. 꽃과 작물은 매 시간 자라다가 어느 순간 훌쩍 컸다. 처음에는 졸음을 깨기 위해 탕비실로 향했는데 연차가 쌓인 뒤부터는 창밖을 보기 위해 탕비실로 갔다. 당시 나는 스스로의 능력과 미래에 회의감을 느꼈다. 분명 안락한 환경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척 제한적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오래 다니긴 힘든 곳이라고 했다. 딱히 대단한 일을 하고 싶던 것도, 많은 연봉을 얻고 싶던 것도 아니지만 이런 일을 해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도 부족하고, 그렇다고 실력을 쌓기에도 무리구나,라고 판단하고 속을 끓였다. 그럴수록 더 자주 탕비실로 향했다. 문득 나도 뭔가를 키워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식물이나 동물을 들였다. 무언가가 내 주변에서 자라고 변하는 모습을 봐야 만족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건 스스로의 무능함에 대한 반발심이 아니었나 싶다. 점심 밥상에 상추가 놓였다. 나는 농담 삼아 "회사에 상추를 심어볼까요?"라고 말했다. 탕비실에서 1.5L 페트병을 구해 반으로 자르고 배수구멍을 뚫었다. 다음날 상사 한 분이 상추 모종을 데려왔다. 우리는 페트병에 흙을 담고 상추를 심었다. 사무실 내부는 채광이 좋지 않으니 베란다에 놓았다. 그때부터 상추에게 적합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매시간 베란다로 향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행동을 이해해 준 직속 상사는 속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시 나는 베란다의 온습도나 채광이 상추에게 적합한지에 몰두해서 몇 번이고 베란다를 들락거렸다.


해의 기울기와 베란다의 그늘을 계산하며 일조량을 적절히 맞췄다. 매일 흙의 상태를 확인하며 물을 주고 배수가 잘 되지 않으면 흙을 긁어내거나 틈을 만들어 건조했다. 그럼에도 상추는 나날이 시들어갔다. 반대로 맞은편 옥상의 상추는 몸집이 굵어져 나무처럼 키가 솟았다. 나는 쪼그려 앉은 채 흙을 손가락으로 슥슥 긁어냈다. 오월의 볕이 뜨겁게 쏟아졌다. 종종 업무에 지친 동료가 다가와 상추의 상태를 물었다. 의기양양하게 상추가 자라면 점심에 다 함께 먹자고 했는데 면목이 없어졌다. 뒤늦게 영양분이 부족한가 싶어 액상비료를 먹였다. 그래도 진전이 없더니 결국 죽었다. 베란다 한쪽에 놓아뒀던 상추를 비워내고 페트병을 정리했다. 왜 상추가 죽었을까. 이후로도 상추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역시 뭐든 키우는 건 어렵다. 누군가의 말처럼 사무실은 뭔가를 키우기 부적합한 환경일지도 모른다. 그것만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다.


마침 시골로 내려올 일이 생겼다. 당시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상추, 관엽식물, 고사리뿐만 아니라 병아리도 부화시켰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았지만 생활의 변화가 일어났다. 버스가 하루에 12번 오가는 농촌이었다. 작은 구멍가게는 물론 식당도 전혀 없는 고요한 곳이었다. 음식을 구매할 수 없으니 작은 텃밭으로도 살 수 있는 생존능력이 필요했다. 준비된 것은 없었지만 상추씨앗이 있고 키울 수 있는 땅도 생겼다. 쫓기듯 내려왔지만 이곳에서라면 상추도 닭도 살 수 있었다. 봄이 오고 언 땅을 갈아낸 뒤 상추씨앗을 뿌렸다. 회사에서 지켜봤던 것처럼 아침이나 해 질 녘마다 물을 주러 나갔다. 싹이 트고 잎이 피어나며 점점 위로 솟아올랐다. 볕이 강한 날에 시들었던 상추가 새벽이 되어 다시 솟아났다. 그렇게 3주가 지나자 매일 염탐하던 옥상처럼 작물이 곁에서 무성하게 일어났다. 보고 싶던 광경이 드디어 펼쳐진 순간이었다. 


상추는 키우기 가장 쉽다지만 상추를 키우는 것조차 힘든 환경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조망권이 확보된 빛이 따스한 집보다 창 하나 제대로 난 곳을 찾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러 편의시설도 좋지만 상추 한 포기 자랄 정도만 되어도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상추가 자라는 건 당연하지 않고, 키울 수 있는 환경에 다다르는 데도 우여곡절이 따른다. 호스를 들고 밭으로 향할 때마다, 작물이 시들지 않고 굳세게 일어날 때마다 경이로운 감정이 든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고 쉬운 일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바라는 일이 되곤 한다. 밭을 일구는 분들에겐 작고 엉성한 텃밭이지만 상추 하나에도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나름의 능력이라고 만족한다. 그때 상추가 시든 것을 계기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다소 이상한 접점을 만들며 한 쌈 싸 먹는다. 아삭아삭한 맛이 들 때마다 뭉클한 맘이 든다. 상추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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