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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각화 Apr 05. 2024

아득한 어둠 속 그 안에서도 꽃은 피어난다-07

최선의 말과 최악의 말

한 집안에 투석환자가 생겼다는 것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맘껏 웃는 것

맘껏 먹는 것

외식하는 것

언제든 마음만 내면 떠날 수 있었던 여행


삶에 작고 큰 행복을 주던 일상에도 제약이 따르기 시작했다.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모든 것을 낯설어했다.


자신이 지내던 안방의 공간도 어색해했고, 작은 소리에도 민감해했다. 아이들이 달려와 매달리는 것도 조심스러워 뒷걸음질을 쳤다.


그가 일상생활에 적응을 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아이들을 케어하는 것 이외에 내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역할이 되었다. 날 좋은 주말에는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뛰어놀게 시키고, 그에겐 조용히 안정된 시간을 갖게 했다. 아직 어린아이들에게 아빠가 아프시니 조용히 지내자라는 말이 통할리 없으니 말은 말대로 하더라도 분리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을 하곤 내린 결론이다.


투석 환자를 위한 식단, 식이요법 등을 지켜내려면 인, 칼륨, 나트륨 관리를 해야하는 이유로  단백질과 수분, 과일, 야채 섭취의 제한이 따르니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맛스러운 식사를 절제할 수 밖에 없었고, 식단관리를 주의해야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외식이란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투석 초기, 그 생활에 적응하기 전 그는 자신은 못먹는데 음식이 넘어가냐고 투덜거리기 일쑤였고 아픈 마음이 들어차 자꾸만 옹졸한 말들을 쏟아냈다. 그런 그의 말과 행동은 아이들에게 더 거리감을 갖게했던 것 같다.


당시엔 아이들의 웃음소리, 울음소리, 투닥거리는 소리에도 민감해하면서 아이들을 향해 못난 말을 내뱉는 그였고, 그런 그의 모습에 상처라는 것을 아직 어린 동생들은 모르고 지나갔지만, 큰아이와 나의 기억 속엔 우리가 이걸 극복할 수 있을까 큰아이는 큰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깊이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가족들 모두에게 마음의 상처가 여러번 스치고 지나가기를 반복하는 두 달여 기간이 지나고. 너무 감사하게도 3회 혈액투석을 하며 일상의 삶을 그가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상의 삶을 받아들인다라고 느끼게 된 이유는 자신의 입으로 아이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얘들아, 아빠가 좀 아파. 그래서 너희를 예전처럼 몸으로 놀아줄 수가 없고, 많이 안아줄 수가 없어. 미안해."


아빠가 아픈 것.

전처럼 못 놀아주고, 안아줄 수 없는 것.


내가 아이들에게 이미 여러 번 알려주었던 말이고,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얘기였을 테지만, 저 말은 아이들을 향해 이해를 구하는 말임과 동시에 자기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고 있음이 느껴졌던 말이었다. 나는 기억에 없는 상황들, 그가 내게 참 고마웠다고 기억하는 몇몇 순간들이 있는데, 그날도 그중 하나였다고 한다. 곁에서 지켜보던 내가 자신이 말을 마쳤을 때 해준 말이 참 고마웠다고.


"아빠 한 번씩 안아 드려 보자~"


기다림.

큰아이와 내가 이 시간들이 극복이 될까 걱정했던 것. 그것은 기다림이라는 것으로 당시의 풍랑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픈 사람이 한순간 자신의 아픈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까. 스스로도 얼마나 고통이고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두 달여 기간 동안 그 또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막연한 어둠 속에서 그의 마음의 변화는 작은 빛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빛이 나와 아이들에게 닿으며 더 큰 빛으로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기 시작했던 것 같다.



최선의 말과 최악의 말


개인사업의 시작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기 시작하고 그 두 달 여 기간 동안 많은 생각을 홀로 고민하던 그는 자신의 상황에 맞게 개인 사업을 시작해 보겠다고 했다. 그와 나의 전공은 컴퓨터과학,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이다. IT사업으로 게임이 되었든, 휴대폰 앱을 개발하든 , 연구기관의 용역을 받아 일을 하든 1인 기업을 창업하여 일을 하는 개발자들이 종종있어 그도 그러한 경우처럼 자신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자리로는 그것이 길일거라는 생각 정리를 했던 것 같다.


주 3회 혈액투석을 하면서 직원으로서 어느 회사에 소속되어 일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모르지 않고, 그런 사정을 인정해 주는 회사를 찾는다는 것 또한 상당히 어려운 일이니까. 자리만 잘 잡힌다면 개인사업으로 사업장을 꾸려 일을 해나가는 것이 더 낫겠다는 결론을 내린 그에게 나는 그저 감사했고, 다시 일을 하겠다고 용기를 내준 그가 너무 고마웠다.


무엇이 힘이었고 무엇이 그런 의지를 가져다주었는지 그에게 물었을 때, 그는 머뭇거림 없이 답을 했었다.


"우리들의 막내가 힘이야."

"어머니께 당신 하나는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승낙받고 결혼했는데, 이제 다시 일해야지."

 

책임감.

그가 말한 힘과 의지는 따로 볼 것 없이 하나였다. 책임감.


그가 일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개인사업을 시작한다 해서 바로 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올 리 없고 한동안은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내가 아무리 풀타임으로 뛰며 관리학생을 받아 일을 해도 전에 그가 해오던 벌이의 절반정도 될까 말까 한 벌이이니.


아이들 학원이라는 건 언감생심이고 한눈팔지도 않고 살았지만 카드값이 조금씩 쌓여갔다. 나라에서 투석비용 지원을 해준다고 하지만 검사비 등등은 고스란히 무게가 되며 병원비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그걸 리볼빙이라는 아주 좋은 제도(?)에 기대어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마트에서 시장을 보는데 한도초과가 뜬다. 그럴 리가 없는데?(리볼빙은 절대 좋은 제도일 수가 없다. 어쩌다 놓친 결제금액을 이월시켜 며칠간 이자와 완납을 하는 경우로 이용한다면 연체를 당하지 않게 할 수 있으니 좋을지 모르나, 나처럼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 없이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절대 이용하면 안 되는 제도라 생각한다. 계속 누적되니 신용도 관리도 안될뿐더러 리볼빙 수수료도 낮게 책정되지도 않는다. 이후 경제관념이 생기고는 신용카드는 다 잘라버렸다. 그리고 체크카드만 쓴다.)


큰 구멍이었다. 아이들과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오전에 집안일을 해놓고 오후 1시부터 수업을 시작해 고등부까지 하면 밤 11시에 집에 돌아온다. 정신없이 쓰러져 자고 일어나면 다시 아침..  그런 패턴으로 살다 보니, 카드값이 어느 정도 밀려나가는지 체크도 하지 못한 채... 그 구멍이 그렇게 커다랗게 나기까지 모르고 살았던 거다.


어떡하지? 막막했다. 급한 대로 현금서비스를 받아 꼭 필요한 돈을 계좌에 넣어두고 다섯 자매 중 제일 친한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언니는 형부에게 얘기해 볼게라는 말로 우회해서 거절을 했고, 다음날 고민 고민 끝에 너무 죄송하지만 엄마께 연락을 드렸다. 엄만, 이미 언니에게 연락을 받으셨다고 했다. 그리곤 얼마가 필요하니라고 물어오셨다...


그 암담한 상황 속에서 들었던 최선의 말.


"얼마가 필요하니?"


필요한 금액을 부탁드리고, 꼭 갚겠다고 엄마께 빚으로 남기지 않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렇게 엄마께 도움 받은 돈으로 최악의 경제상황으로 몰렸던 우리집은 바닥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남편의 사업이 다음 해부터 잘 자리 잡혀가며 유지가 되었고 엄마께 빌린 돈은 2년 뒤에 바로 다 갚았다. 이자와 함께...)


최선의 말의 짝지인 최악의 말은 같은 일, 같은 상황에서 나왔던 말이다. 바로 나와 제일 친한 언니의 입에서..  


"걔네는 폭탄이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요. 엄마 도와주면 안 돼요."


이건 사실 내가 직접 들은 소리가 아니다. 다른 언니한테 전해 들은 말이지... 어떤 앞뒤 맥락이 더 있을지 모르나, 어머니께 돈을 갚을 때 여쭤보고 알았다. 전해 들은 그 말이 진짜 있었던 말이란 걸..


우리 가정이 불안정하고 애들도 많으니 엄마와 언니들끼리 둘러앉아 얘기를 했었다고 한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우리 가정을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이라고 얘길 하며, 도와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고 한다. 차라리 이혼을 해서 나라 도움을 받는 게 낫다고...


냉정하게 본다면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나의 머릿속엔 이혼이라는 것은 없었다. 서류적인 이혼.. 나라의 도움을 받기 위한 편법적인 이혼..  그런 것조차도 우리의 머릿속엔 그 단어를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함께, 우리 같이. 손잡고 일어서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노력하며 살아나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와 나였는데, 언제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까 미리 앞서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저런 말들을 쏟아냈던 것을 훗날 알았을 때 마음에 박힌 비수는 지금도 빠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언니에게 언니가 했던 말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언니를 바라보면 지금도 아프다. 그곳이...


남편의 사업이 안정적으로 이어가고 여전히 불안정한 요소들은 갖고 살아가지만,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기고 남편이 병원 안 가는 날에 맞춰 짧더라도 1박 2일 정도의 여행을 갈 만큼의 여유가 생긴 것을, 최악의 말을 선사했던 언니가 가장 좋아해 주고 있고, 그렇게나마 안정을 찾아 살아가줘서 고맙다고 얘기해주고 있지만 어쩜 그렇게 박힌 비수는 평생 빼지 못한 채 가슴에 박고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언니에게 나는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 덕분에 나는 더 악착같이 우리를 지키려 노력했고, 더 사랑하려 노력했고, 안 좋은 상황에서 벗어나는 최단의 길을 선택했으니까.


그렇게 그런 시간들을 지나며 경제관념이라는 것도 생기고, 불안정한 상태이면서도 안정된 상태로 나와 그는 각자의 직장에서 일을 하며 서로 보완을 하면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이들의 밝은 웃음이 힘이 되고, 그의 말처럼 자박자박 걷던 막내가 그 시간들 속에 갖은 재롱으로 힘을 보태주어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었다는 그의 말은, 나에게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힘이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주는 '우리'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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