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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각화 Apr 08. 2024

아득한 어둠 속 그 안에서도 꽃은 피어난다-08

우리가 진정한 우리로 적응이 되기까지_내게 힘이 된 모든 것

지칠 대로 지쳐가는 몸

의지로 이겨나가 보려는 몸부림

단단한 척 꿋꿋한척하지만 안으로 곪아 들어가는 상처


나는 서서히 지쳐갔고 남들에게 잘 지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웃으며 의연하게 살아가는 듯한 겉모습과 참을 '忍'을 써가며 버텨내는 내면의 괴리가 점점 커져갔다.


'그'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까?


한 개인의 커다란 변화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더욱이 가족이라는 구성 안에서라면 더더욱.




그와 내가 의지로 이겨냈던 시간


신도시에 이사오자마자 투석을 시작하게 되었고, 신도시에는 안타깝게도 혈액투석병원이 없었다. 대학병원에서 퇴원을 함과 동시에 개인 혈액투석병원을 찾는데, 그래도 적정성 평가에서 인정받는 곳 1등급 내지는 2등급 정도의 병원을 고려하니 집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개인병원이 가장 적당하다 여기곤 남편은 그곳으로 화, 목, 토요일 오전 투석을 받으러 갔다. 투석 시작시간이 7시.


투석을 받고 돌아오면 몸이 너무 힘들어서 쓰러져 잠들었었고, 잠들지 않으면 몸의 모든 곳이 안 아픈 곳 없다고 말을 했었다. 여기 주물러 달라, 저기 주물러 달라.. 늦은 시간 퇴근하고 돌아오면 나의 몸도 천근인데, 자신의 아픈 몸들을 주물러달라고 요구를 한다. 밤 11시.. 널브러져 있는 집안일도 해야겠는데 자신의 몸을 주물러 달라하니 안타까운 마음에 잠깐 토닥여주고 마무리하면 자정이 되어갔다.


새벽 4시 40분.

알람에 눈을 뜨면 냉장고 문부터 연다. 냉장실에서 꺼낸 야채는 바로 담그고, 나물은 데쳐서 물에 불려다. 그래야 수용성인 칼륨수치를 줄일 수 있으니까. 체내 칼륨이 높아지면 부정맥으로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어 철저하게 관리해야 되는 부분이다. 그래서 아침 일찍 기상을 해야 그에게 맞는 식이요법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에 나의 잠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늘 잠이 부족한 상태로 주중은 이어지고 일요일은 최대한 양껏 자는 것이 나의 패턴이 되었다. 지금생각해 보면 어떻게 저걸 해냈었는지 모르겠다. 아이들도 어려서 손이 참 많이 는데 말이다. 살아가는 것, 우리 가족이 무너지지 않고 살고자 했던 의지였다는 말이 아니고서는 답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내 별명이 있었다. 토끼.

예쁘고 귀여워서가 아니라 눈이 항상 빨갛게 충혈되어 있어서. 토끼눈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아이도 있었, 아마도 아이들이 만들어줬다기보다는 엄마들이 나를 보고 아이들과 얘기하며 그런 별명이 생긴 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아이들이 어린데, 어떻게 늦은 시간까지 수업을 하고 밤 11시 퇴을 할 수 있었을까?


그의 퇴근 시간은 6시. 큰아이가 중학생이니 오후 4시 조금 넘으면 하교를 한다. 중학교 옆에 초등학교가 바로 붙어있어 아빠가 오기까지 그 공백의 시간 동생들을 돌보는 것은 큰아이가 거의 도맡았다. 하교하면서 둘째를 돌봄 교실에서 데려 오고, 집에서 잠깐 숨 돌리다 집 앞 어린이집에서 오후 5시에 넷째를 데려 온다.  


셋째의 유치원은 조금 떨어져 있었다. 공립유치원이라 등하원 차량이 없는 곳이어서 셋째의 등하원은 내가 시켰다. 등원이야 내가 수업을 들어가기 전이니까 충분히 가능하지만 하원은 일부러 관리학생을 그 시간대에 배치하지 않았다. 오후 5시 30분~6시는 비어있는 시간으로 세팅을 했고, 셋째를 하원시켜 집 주차장에서 큰아이에게 인계하고 나는 다시 수업을 가는 거다.


큰아이 중1. 한참 예민한 여중생 사춘기 시기.

그 아이가 감당해 내었을 생활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 없는 저녁시간, 아무리 엄마가 미리 준비해 둔 찌개와 밑반찬으로 밥을 챙겨 먹더라도 냉장고를 열고 닫고,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사용한 그릇들을 개수대에 담가놓는 일 자체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거다. 둘째가 중학생일 때 바라보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을 보면 큰아이의 당시의 생활이 얼마나 힘겹고 벅찼을지 가늠이 된다. 혼란스럽지만 가정을 위해 아빠와 엄마가 지켜나가듯 자신도 그것을 함께 짊어지고 지켜나갔을 거란 생각에 너무 빨리 성숙해 버린 아이가 참으로 안타깝고 안쓰럽다.


그의 의지.

나도 나이고 큰 아이도 큰 아이이지만, 그의 의지를 내가 대단하다고 여긴 것은 이러하다. 투석을 하고 쓰러져 잘 수밖에 없 몸, 온몸이 아파서 주물러 달라고 했던 그 몸을 이끌고 투석이 끝나면 회사로 가서 일을 하고 퇴근을 하는 패턴으로 자리 잡아갔던 그의 의지. 점심은 이른 아침에 싸준 아내의 도시락으로 버티며 책임져야 할 가정을 위해 버텨내 준 그 의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혼 전 나하나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했던 책임감이,  나 하나가 다섯으로 바뀌며 부풀러 진 그 큰 책임감을 떠안고 그는 죽기 살기로 버티며 이를 악물었을 것이란 걸 모르지 않기에,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나는 인내의 시간을 지났고 큰 아이에게도 무언의 인내의 시간을 강요했던 것 같다. 참으로 미안하게도.




이해와 인내의 시간


그의 개인사업이 탄력이 붙기 시작하자 그만의 독특한 성향이 다시 나타났다.

이것을 뭐라고 해야 할까?


자신이 아파서 다른 것을 하지 못하고 있던 시간, '나는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아이들과 나에게 이해해 달라고 요구했다면, 일을 시작하게 되니 '내가 일을 할 테니, 나에게 모든 걸 맞춰. 나를 스트레스받게 하지 마.'라고 요구했달까?


그가 투석을 시작하고 친정엘 3년간 가지 못했다. 역으로 3년간은 친척들의 방문도 극도로 싫어했는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연락 없이 방문한 친정식구들로 인해 나와도 몇 차례의 갈등을 겪었다.


시댁식구들의 전화도 극도로 싫어해서 시댁식구들도 나를 통해 그의 소식을 물어왔고, 맏며느리가 없어 둘째 며느리였던 내가 명절을 책임져야 하는 관계로 그는 명절에 움직이지 않았지만, 나는 아이들과 음식을 장만해서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찾아뵈었다. 시댁 가까이에 막내며느리가 있었지만 어머님과 동서 간에 고부갈등이 깊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내 일이 되었다.


남편은 자신에게 걱정스러운 마음을 전달하는 친인척들의 따뜻한 말을 그저 위선으로 느꼈으며, 이미 투석하는 자신에게 신장에 좋은 음식이라고 챙겨 오는 장모님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신다고 이미 망가진 신장에 좋은 음식 따윈 없는데 불필요한 친절을 보인다며 거칠게 거부했고 나에게 대놓고 장모님 못 오게 해달라고 말을 했다. 그렇다. 몸이 병들어 아팠고, 마음이 병들어 옹졸해진 거다.


그가 내뱉었던 끔찍했던 말들..

"다 투석해 봐야 돼. 그래야 나를 이해하지." 

"○○엄마, 투석해 봤어? 모르면 말을 하지 마."


그렇게 몇 년간을 시댁식구, 친정식구들과 갈등을 겪곤 훗날 하는 말 그냥 자신에겐 시간이 필요했었던 것 같다고, ○○엄마한테 상처를 줘 너무 미안하다고 고해성사하듯 말하는 그를 보곤 나는 눈물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마음이 병들어가듯 빈번하게 발생하는 갈등 속에서 나도 지쳐갔고 마음의 병이 커져갔다. 친구는 우울증 약을 먹는 게 낫지 않겠냐고 권했었고, 나는 이겨낼 수 있다고 버티며 살아갔다. 그러다 시에서 운영하는 무료 가족상담센터를 알게 되었다. 사이버상담으로 사연을 남기곤, 상담선생님이 배정되어 주 1회, 두 달간의 대면상담을 받게 되었다. 상황적으로는 남편도 함께 상담을 해서 보다 적극적인 해결을 권하셨지만, 친인척도 거부하는 그에게 그것을 권하기는 나로선 난감했고 내가 이 시간을 극복해야 가정을 끌고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저만이라도 상담을 해주십사 말씀을 드렸다. 부분적인 갈등 해결이 될지언정 그렇게라도 해보자고 말씀해 주신 상담선생님. 함께 울고 웃으며 나의 상황과 사연, 아픔을 어루만져주시며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모든 것은 나의 마음에 달려있음을 짚어주셨다.


"○○○님, 이 세상은 ○○○님을 중심으로 돌아가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되 흔들리지 마세요. 그리고 마음이 아프면 참지 마세요. 그건 내면에 마그마가 되고 그게 터지면 화산이 되어 아주 심각하게 분출합니다. 모든 것을 망칠 수 있고,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시는 가정도 아이들도 흔들리게 될 거예요. 마음이 아픈 것. 표출하세요. 어디에? 누구에게? 절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돼요. 감정 쓰레기통을 만드세요. 수첩도 좋고 비밀일기장도 좋고 본인만의 비밀적인 기록장에 욕이 되었든, 아픈 것을 다 담아버리세요. 그리고 닫고 나오는 겁니다. 제가 봤을 때 ○○○님은 분명 그렇게만 해도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이미 많이 단단해져 계시고, 어떤 상황이든 함께 이겨낼 아이들이 곁에 있거든요."


그랬다. 난, 상담선생님을 통해 힘겨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웠고 그렇게 이겨낼 수 있었다. 감정 쓰레기통은  처음엔 아주 많이 이용을 했고 그득하게 차있겠지만 갈수록 점점 그 쓰레기통을 열고 닫는 일은 줄어들 수 있었다.


힘들어 무너져가던 나를 다시 제자리에 서게 해 주셨던 그 선생님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참으로 감사한 분을 만났다. 훗날 내가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나도 저렇게 누군가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이겨낼 수 있도록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떠한 방법으로 가능할지는 지금도 고민이긴 하지만...




내게 힘이 된 모든 것


내가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당연코 우리 아이들의 힘이 크다. 한 편의 시로도 담았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 내가 퇴근해 돌아오면 이미 잠들어있고, 아침에 눈을 뜨며 다녀오셨냐는 인사를 하는 시간들로 지내온 2년 반이라는 시간. 가족의 날을 지날 때면 아이들 넷이 미리 준비했던 장기자랑을 보여주며 그 시간이 끝나곤 아빠와 엄마에게 부비부비 한다. 이것은 내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고 큰아이의 기획이었다.


큰 아이는 엄마, 아빠, 동생들 우리 가족이 모여 웃을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가족의 날을 위해 준비를 했다. 그 아이가 느꼈을 위기, 그것을 이기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순수한 마음으로 아빠가 아프기 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행복했던 시간을 그려 만들어낸 해피타임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것이 우리들에겐 하나 된 마음으로 웃으며 마음 가득히 사랑을 담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가족의 날 : 어버이날, 크리스마스나 연말 중 하루로 공연일을 잡아 1년에 두 번 가족의 날이 되었다. 지금은 큰아이가 이미 대학생이고 둘째가 고등학생이라 작년 연말에는 초등학교 다니던 셋째와 넷째의 바이올린 연주가 공연이었다. 그날, 셋째가 선언한 말이 있었다. 동생에게 남긴 말. "내년에는 너 혼자 해라. 나도 졸업이다"^^)

아이들은 2년 반이라는 기간이 지나는 동안 학교생활을 잘해주었고, 학원의 도움 없이 각자 자신들이 해야 할 공부를 스스로 해내었으며, 학교생활에 내가 도움을 준 것이 있다면 주말을 이용한 엄마의 코칭 정도였다.(경제적 기반이 약한 상태일 때, 사교육 없이 공교육만으로도 아이들은 잘 해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여유가 생기니 역시나 나도 아이들에게 사교육을 시키게 된다. 입시경쟁을 따라잡을 방법은 이뿐인가 하는 씁쓸한 마음이 들면서도 말이다.)


나를 사랑이라는 힘으로 이끌어 주며 내가 이 가족을 더 보듬고 끌어안으며 살아가게 해 주신 분은 시어머님이다. 어머님은 아픈 아들을 데리고(?) 사는 나를 많이 안타까워하셨다. 그리고 시아버님이 마지막 편찮으셨을 때 고약한 성정으로 어머님께 있는 정 없는 정 다 끊고 가셨다며 아들이 그런 성정을 닮았다면 어미가 많이 힘들 거라고 나를 다독여주셨다.


남편에게 보다 어머님께 많이 들었던 '사랑한다'.

결혼하곤 마치 정해놓은 규칙처럼 어머니와 나는 통화를 했었다. 1주일에 주중엔 어머니께서, 주말엔 내가 전화를 드린다. 아주 특별한 사정이 아니고서는 주 2회 통화가 되는 거다.


이러저러한 안부를 묻고 전화를 끊기 전에 어머님은 내게 항상 말씀하셨다.

"애미야, 사랑한다~"

... 사랑이라는 말이 어색해서 나는

"네, 어머님. 저도요~"

이게 답이었다.


그렇게 계속 받기만 하던 사랑의 말씀을, 어머님이 치매진단을 받고서야 나는 가슴을 쥐며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건강하세요. 백수하셔야죠. 저희 잘 사는 거 보셔야죠."


치매 진단을 80세에 받으시고 벌써 10년. 7년째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님. 이제는 알아보지도 못하시고 말씀도 못하시고 식사도 콧줄로 하신다. 정신도 건강하시고 몸도 건강하실 때 더 잘해드리지 못한 부족한 며느리라 어머님만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드릴 수 있을 때 많이 사랑해 드릴걸 하는 마음이 떠올라서...


어머님이 내게 해주셨던 '사랑한다'라는 말.

나는 그 말이 내게 담기고 담아 힘들었던 그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으로 작용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친정어머니가 해주시던 말씀들.

"○○아! 해낼 수 있지? 마음 강하게 먹고. 애들을 봐라. 네가 무너지면 안 돼. 우리 딸. 할 수 있지? 넌 엄마 딸이니까!"


항상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응원의 말들로 친정어머니의 말씀이 내게 씩씩하고 단단한 마음가짐을 심어주셨다면, 어머니는 사랑한다는 말씀으로 나의 내면에 사랑이 항상 움터있게, 메마르지 않게, 따뜻한 사람으로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을 심어주신 것 같다.


두 분의 어머니는 그렇게 내게 힘을 주셨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나의 남편을 사랑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극복하며 이겨나갈 수 있는 큰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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