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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룸 Oct 02. 2023

자귀나무만 보면


  자귀나무만 보면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린다. 못 본 척 한다. 그러나 이미 보아버린 뒤이므로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물론 좋지 않은 영향이다. 괜히 피하겠는가. 어쩔 수 없이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의 조각들이 침투해 들어와 마음을 콕콕 찌른다. 자연히 인상이 찡그려진다. 특히나 여름의 초입에 자귀나무에 빨갛게 꽃이 필 때면 자주 벌어지는 일이다. 공원이든 천변이든 야외에서든 넘치는 초록빛 속에서 빨간 빛깔이 톡톡 튀어나오면 눈이 안 갈 수가 없다. 한 번은 운전을 하며 가다가 빨갛게 꽃이 피어난 자귀나무를 보곤 서둘러 고개를 돌린다는 것이 그만 핸들마저 휙 꺾어버렸고, 가드레일에 자동차를 부딪친 적도 있다. 그녀와 헤어진 지 10년도 넘게 지났건만, 나는 여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혀가 길었다. 그래서인지 발음하는 게 좀 특이했다. 남들이 자기야, 라고 말할 때, 그녀는 자귀야, 라고 말했다. 아니, 그녀도 자기야, 라고 말했겠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자귀야, 였다. 처음 만났을 땐 그런 발음이 얼마나 귀엽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재미있는 말을 하지 않아도,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봡은 먹었숴요? 래일 영화 함꿰 볼뤠요? 그런 특이한 발음들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고, 그리하여 나는 그녀에게 홀라당 빠져들었다. 다른 남자들에게는 보통 사람들처럼 발음하고 오직 나에게만 그런 식으로 말해 주기를 바랄 정도였다. 다른 남자들에게도 나를 대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말하는 것을 볼 때면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녀를 얼른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 퀴스해 줘, 라고 소곤거릴 때면 그 얼마나 감미로웠던가. 남들이 키스를 할 때 우리는 퀴스를 한 것이다. 발음 자체만으로도 남들보다 길게 키스를 음미할 것 같은 황홀한 발음이라니……. 자귀야, 사뢍해, 는 또 어떤가. 아주 길고 깊은 사랑의 울림을 주지 않는가.


  그다지도 사랑스러운 그녀였는데…… 3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서부터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사랑의 유효기간이 2년 6개월쯤이라고 하던가. 만남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애교 넘치는 발음에도 이제 심드렁해졌다. 그래서 가끔씩 놀리기도 했고, 그녀의 발음을 흉내 내기도 했다. 문제의 발단은 거기에서부터였다.

  자귀야, 라고 그녀가 나를 부를 때, 왜? 귀를 어떻게 해줘? 깨물어줄까? 나는 그런 식으로 반응했다. 처음엔 피식 웃어넘기던 그녀가, 몇 번 반복하자 인상을 찡그리며 화를 냈다. 구러쥐 마!

  그래, 거기서 그만 두었어야 했다. 내가 재미로 하는 말이나 행동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을 인식한 순간 멈추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 당시 난 너무도 어리석었다. 내 기분과 욕망에 취해 말하고 행동할 때가 많았다.

  아…… 퀴스해 줘, 라고 소곤거리는 그녀에게 내가 어떻게 했던가. 그녀의 발음을 흉내 내면서, 퀴~스? 퀴스라고 한 거야, 퀴즈라고 한 거야? 그러자 그녀가 나를 한참 노려보다가 밖으로 휭하니 뛰쳐나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나갔고, 미안하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사정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줭말이쥐? 나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몹시도 착했고, 나는 그녀를 대할 때 긴장감을 해제한 지 이미 오래였다. 말실수를 하고 나서도 언제든 미안하다고 한 마디 하면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가리라는 안이한 생각 속에서 살았다.


  그때가 바로 6월이었다. 공원을 함께 거닐고 있을 때 빨갛게 꽃이 핀 자귀나무가 보였다. 내가 자귀나무의 이름을 몰랐으면 어땠을까…… 그녀와 헤어진 뒤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가정을 여러 번 했었다. 자귀나무 이름을 몰랐으면 그녀와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잘 지내오기라도 하리라는 듯이. 내가 이렇게 한심한 인간이다.

  와, 예뿌다. 나무 위룸이 뭐야? 라고 그녀가 물었고, 나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나야,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귀나무야, 자귀나무. 자기나무가 아니라 자귀나무. 나는 히득히득 웃으며 ‘자기’와 ‘자귀’에 힘을 주어 강조하며 말했다.

  그때 그녀의 표정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화가 나거나 분노에 사로잡힌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고요하게 끝을 선언하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참을 만큼 참아왔는데 이제 더 이상은 못 참겠어, 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너란 인간은 정말이지 구제불능이구나, 하고 그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서늘함을 느끼며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생각나는 대로 입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될 말이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동안 여러 번 겪은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이 절절히 느껴졌다. 편한 상대일수록 말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가슴 깊이 서려왔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한다고 될 일 또한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곁을 떠나갔고, 나는 멈춰선 채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난 그녀를 만날 자격이 안 되는 인간이구나, 하고.


  그날 이후로 나는 그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새로운 여자와 사귄 적도 없다. 몇 명 만나본 적은 있지만, 일정한 거리를 둔 상태를 넘어서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되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봐서 두려움이 앞섰다. 그래서 만남이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만약 사랑에 빠져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절대로 상대방의 단점을 가지고 농담을 하거나 흉내 내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라고. 상대방의 단점을 사랑스럽게 받아들이라고. 사랑의 성패는 거기에 달려있다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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