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겨울. 귀향 장례식장.
늙은 몸 안에서 자명종이 울렸다. 나는 눈을 떴다. 자리끼라기엔 과한 것을 단숨에 비우고, 그곳에서 바랑을 꺼내 탁탁 털었다. 품고 잠들었던 것은 그 자리에 없었으나, 주위는 이쪽저쪽 둘러봐도 꽉 막힌 벽. 무언가 있을 만한 곳은 밝으나 어두우나 그곳뿐이었다. 누가 훔쳐갔을 리는 없었다.
쇠한 몸의 뒤척임에 지난밤 부대낀 걸까. 제 풀에 헐거워진 바랑 입구를 열고, 깊숙이 팔을 넣어 그 자리에서 최신식 면도기를 꺼냈다. 좌르르- 보드라운 미세 진동이 턱과 머리를 오가며 맨살에 수없는 길을 냈다. 황홀한 떨림에 몇 안 남은 털이 곤두섰다. 스쳐 가는 얼굴들이 있어 웃음이 날 뻔한 걸 추스르며, 다시금 바랑 깊숙이 팔을 집어넣었다. 그 자리에 최신식 면도기를 넣어두었다. 겨드랑이 밑까지 쑥, 손끝이 바닥을 스쳐야 하는 그 자리. 훔쳐 갈 땐 훔쳐 가더라도 이것은 안 되었다. 늘그막이 무색한 설렘이었다.
첫 목탁을 꺼냈다. 버리려 해도 버릴 수가 있어야지. 그러고 보니 뭘 버려본 적 있어야지. 여기저기 금이 간 그것을 단단히 쥐고 보니, 한순간 목구멍에 작은 파도가 일었다. 중이 처음 제 머리 깎던 날 삼켰던 미세 진동과 같은 떨림. 힘만으로 파도를 잠재운 날은 없었다. 어린 중이 늙은 중이 되도록 그런 날은 없었다.
어둑한 바랑 안을 목을 빼고 들여다볼 때, 저 아래에서 서슬 퍼런 빛을 내는 오래된 삭도를 가장 버릴 수 없었다. 훔쳐 갈 게 없어서 이걸 훔쳐 간 놈은 반드시! 핏빛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었다. 도둑맞은 삶 앞에선, 더욱이 오랜 시간 염불을 외었다. 내 숨을 타고 흐르는 일초 일초가 죽은 그의 말이 되어 입 안을 돌고 돌았다. 죽어야만 했던 그가, 살고자 뱉었을 순간순간의 말. 아들을 낳다 죽은 어린 중의 어미 또한 안간힘으로 뱉었을 그 말. 어미를 허물고 나온 머리통에 허구한 날 피를 내는 삭도를 삼킨 듯, 넘어가지지 않는 무수의 말이 목구멍에 박혔다. 목구멍을 파고드는 그것들을 나도 모르게 질끈 삼켜냈을 때, 나를 찌르며 나는 피었다. 갈 곳 모르는 발길을 다그치는 자명종. 몸 안에서 쉴 새 없이 울려대는 그것을 아득한 절벽 너머로 던져버리려 했을 때, 나를 찌르며 나는 피었다. 마른땅에 외로이 선 선인장처럼, 어린 중은 피었다.
마지막 한마디가 떨어지지 않아, 어린 중은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허망한 죽음 앞에 빙빙 염불을 외었다. 계십니까, 진정 계십니까, 부처님께 꼬박꼬박 대들었다. 어린 몸이 늙은 몸이 되도록 한낱 중은 계시지요, 진정 이곳에 계시지요, 결국에는 부처님께 싹싹 빌었다. 그러다 보면, 마침내 몸 안에서 자명종이 울렸다. 어린 몸의 중심에서, 늙어가는 중의 몸을 산산이 부수듯 자명종은 울렸다. 두 눈을 내리감고, 목구멍을 찌르는 무수의 말을 질끈 삼켜야 할 때였다. 내 안으로 흘러들어 온 무수의 말을 하나로 굴려야 할 때였다. 흐르는 것은, 마땅히 앞으로 나아감을 되새겨야 할 때였다. 나의 피가 한 곳으로 흐르듯, 아득한 절벽 너머 저쪽으로 마지막 한마디를 툭 던져야 할 때였다. 먼저 가시게.』
누가 깰까 봐 그랬을까. 알아서 음성 지원이 되는 스님의 발인 염불은 핏빛 낭자한 글로 대체되어 있었다.
『꽃이 빨리 지는 것은 그것의 나약함이 아니다. 꽃이 늦게 지는 것은 그것의 강인함이 아니다. 바람 치는 세상에서 영영 나약할 수도 영영 강인할 수도 없어서 그것은, 마침내 가장 온전한 그 때가 되어 마땅히 뿌리로 돌아간 것이다. 나약함과 강인함은 그것을 보는 이의 말일 뿐, 묵묵히 바람에 흔들리던 꽃의 말이 아니다. 지지 않는 꽃은 없으므로 그것은 바람의 속성과는 무관한 자연의 흐름이다. 빠름과 느림은 그것을 보지 못한 이의 말일 뿐, 묵묵히 싹을 틔워낸 꽃의 말이 아니다. 가느다란 한 줄기 뿌리에 흐르는 물기를 온몸으로 빨아들인 그때, 모든 꽃은 이미 땅속에서 피었다. 피다 만 꽃은 없다. 피었기에, 꽃은 진다.』
그것을 써 내려간, 네 귀퉁이가 나달거리는 스님의 낡은 수첩은 내가 건넨 솜 베개 밑에서 발견되었다.
*
모두가 잠든 새벽 2시, 나는 최고급 면도기가 든 바랑을 향해 발을 떼었다. 여기서 이러면 안 될 것만 같은데 저 알아서 들떠버리는 발걸음. 하지만 몇 발 그러다 그 자리에 납작 엎드리고 말았다. 단단한 마룻바닥과 맞부닥친 팔꿈치에 짜르르 전기가 흘렀다. 아오…… 대자로 자세를 바꾼 천년 와불은 자는 게 아니었다. 스님은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잠은 다 많은데 새벽잠은 부족한 듯한 스님. 활기차게 자세를 바꾸며 스님이 또다시 옆으로 돌아누웠다. 내 쪽이었다. 나는 자는 척 눈을 감았다가, 한참 뒤 실눈을 떴다. 스님은 바랑이 굴러 들어간 상 밑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자그마한 스님의 눈이 느리게 움직였다. 새카만 망망대해를 비추는 등댓불처럼 깜빡, 깜빡. 실눈 사이에서 가물가물하는 그 한 점을 나는 최면에 걸린 듯 바라보았다. 주무세요, 주무세요, 똘라…… 똘라는 어디 갔지, 주무세요, 똘라는 주무세요…… 여하튼 이런 식으로 중얼거리다 나는 내가 먼저 잠이 들었다.
*
눈을 떴을 때, 나는 대자 자세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벽시계가 보였다. 4시. 시선을 조금 올려 작은 창을 확인했다. 어둑어둑한 걸 보니 새벽 4시인 듯했다. 휴우…… 바랑이 굴러 들어간 상 밑으로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언뜻 스치는 게 있어, 재빨리 작은 창으로 고개를 되돌렸다. 응?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판타지물에서나 보던 기다란 광선검 하나가 창밖에서 번떡이고 있었다. 검,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칼끝이 뭉툭했다. 아무리 찔러도 피 한 방울 못 낼 듯 둥그런 칼끝. 익숙한 실루엣. 그건, 최고급 면도기의 주인인 스님이 어제도 오늘도 빈소 입구에 얌전히 내려놓았던 야광 지팡이였다.
'……!'
나는 창가로 뛰었다. 급한 나머지 무릎으로 뛰고 말았다. 통증이 밀려드는 양 무릎을 대차게 문지르며 나는 창밖을 건너다보았다.
꺼질 듯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스님이 서 있었다. 한쪽 무릎에 바랑을 걸친 채였다. 무언가를 찾는 듯, 머리를 바랑 안에 거의 집어넣고 스님은 그 안을 뒤적이고 있었다. 바랑이 아래로 자꾸 미끄러졌다. 허공에 걸린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이 거셌다. 스님의 승복이 위로 솟구치며 날았다. 뭘 찾은 걸까, 못 찾은 걸까. 미끄러지는 바랑을 몇 번 바로잡던 스님이 이내 바랑 입구를 동여맸다. 거북처럼 등이 불룩한 실루엣이 되어, 스님은 그길로 야광 지팡이와 함께 작은 창 너머로 사라졌다. 스님이 사라진 창가에서 주황빛 승복 자락이 끈질기게 펄럭였다.
스님은…… 갔다. 나는 멍하니 뒤돌았다. 상 밑 바랑 자리는 여전히 컴컴했고, 스님이 누웠던 자리에는 스님이 없었다. 당연했다. 다만 스님은 뭘 흘리고 간 듯했다. 바랑을 뒤지며 찾던 게 저것일까. 뛰어나가 갖다 드릴까. 내가 건넨 솜 베개 위에 놓인 그것을 향해 나는 빠르게 걸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흘린 게 아니었다. 그건 스님이 선명하게 남겨둔 거였다.
『자비 양, 이게 아주 물건입니다. 그래서 가장 비싼 것을 줄까, 하다가 이것을 골랐지요. 암만 비싼 것이라도 늘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건 이미 고물이니까요. 나는 이 목탁을 평생 두드려 왔습니다. 내게 기억이란 것이 생긴 그때부터 말입니다. 비록 겉모양은 볼품없어졌으나, 이것을 처음 쥐던 어린 날을 떠올리면 새카맣게 늙은 이 중은 아직도 한구석이 파릇해집니다. 자비 양, 아십니까. 나는 이곳에서 염불을 욀 때 자비 양이 발끝으로 장단을 맞춰주어 참으로 기운이 났습니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기도 했지만, 그쯤이면 자비 양의 발끝은 막 절정에 이르기 일쑤였지요. 그 질주 앞에서, 나는 차마 염불이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질세라 목청을 돋웠습니다. 그러나 읍읍, 마스크 안에서 사라지고 마는 자비 양의 작은 화성이 들려올 때면 기운이 나는 만큼 속이 상했습니다. 어디 핏대만 세운다고 가수겠습니까! 어떤 곡에도, 장송곡에도 저절로 스며드는 자비 양이야말로 참된 가수가 아니겠습니까! 주저앉은 이 늙은 중의 흐릿한 시야에 자비 양의 발끝은 꼭 있었습니다. 앞, 옆, 이따금 돌아보았던 뒤, 가리지도 않았습니다. 하여, 떠난 저이들과 함께 태워버릴까 했던 이 목탁을 타고난 가수인 자비 양에게 남깁니다. 삑사리 났을 때, 이 목탁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쉼표가 되어줄 것입니다.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 이 목탁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도돌이표가 되어줄 것입니다. 막상 때려치우자니 멀리 온 것 같고 계속 가자니 제자리인 것 같아 외로워질 때, 이 목탁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오선지가 되어줄 것입니다. 세계를 아우르는 유명한 가수가 되어 행여 이 목탁이 고물처럼 보이는 날이 온다면, 그땐 꼭 돌려주십시오. 대신 사인은 꼭 해서 돌려주셔야 합니다. 누구 딴 사람 주게…… 자비 양, 이 늙은이가 과연 그날까지 살아 있을까요? 그것보단 더 살아야 텐데요…… 아이고, 이런, 또 주책입니다. 뭐든 시작만 했다, 하면 멈춰지지 않으니 큰일입니다. 갈 길이 먼데 말입니다. 그럼 늙은 중은 이만 떠나보겠습니다. 자비 양, 고맙습니다.』
나보다 한국말을 잘하는 스님은 나보다 한글도 잘 썼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앞니 사이로 닷새를 기른 수염이 부드럽게 씹혔다. 당연했다. 편지를 접혀 있던 모양 그대로 접어, 상주복 웃옷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가 이렇게 얕았었나. 이대로는 분명 어디다 흘릴 게 뻔했다. 넣었던 걸 곧장 빼내, 상주복 안 주머니로 다시금 밀어 넣었다. 주머니 위쪽에 단추가 있어서 그것도 단단히 잠갔다. 그러고 나니,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어 가슴을 툭툭 치게 되었다. 어쩐지 든든했달까.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신비한 그 말뜻을 조금은 실감했다. 조심스레, 나는 목탁을 집어 들었다. 목탁에 눌려 있던 솜 베개가 탄력적으로 솟아났다.
*
나는 정좌했다.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목탁 머리를 둥글둥글 쓸어내렸다. 호호 입김을 쐰 뒤 상주복 소매로 그 중심을 닦아보기도 했다. 수없는 균열이 믿기지 않는 매끄러움. 나는 한창 작업에 빠져들었다. 내 손때가 묻으면 묻을수록 목탁은 새것이 되었다. 그때 똘라가 빈소로 들어섰다. 놀란 나는 목탁을 마룻바닥에 떨어뜨렸다. 새벽의 고요가 그대로 박살 났다.
지지직- 삐이익- 삐이이이익-
경찰 똘라의 허리춤에 걸린 무전기에서 신경을 긁는 초고음 하울링이 퍼져 나왔다. 나는 두 귀를 막았다. 바닥을 구르던 목탁이 벽에 부딪히며 섰다. 마른 낙엽처럼 잠든 물음표들이 일제히 몸을 뒤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