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는 길, 휴대전화를 열었다. 단축번호 1번을 길게 눌러 통화를 시도하자 도다리의 전화번호가 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선 도다리가 아닌, 오래전 나를 배신한 그 아이가 떠올랐다. 신에게 총을 맞은 이 마당에도 그 아이 타령이라니. 따르르릉 반복되는 신호음을 들으며 나는 낡은 엔진이 매연을 뱉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아이의 배신은 3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이토록 몸서리치게 했다. 말하자면 그 아이는 나의 구 1번이었다.
어린 시절의 순수였다고 치부하기엔 첫사랑의 후폭풍은 거셌다. 아무리 어렸기로서니 나는 어쩌자고 한순간과 평생을 맞바꾸는 대참사를 저질렀던 것일까. 때는 중1의 막바지, 그 아이를 보며 괜스레 웃음 짓고 있는 나를 알아챈 순간 나는 아무 계산 없이 그 아이를 단축번호 1번에 저장하고 말았다. 머지않은 중2의 첫날, 그 아이가 아무 계산 없이 내 1번에서 지워질 줄은 몰랐으니까. 계산을 안 한 것도 아니고 못한 것도 아니고 계산, 그 자체를 몰랐으니까. 그 미련함의 대가로 아무래도 나는 죽을 때까지 그 아이를 떠올려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 아이는 엘리베이터에서 1층을 누를 때도 떠올랐다. 급식실에 1번으로 도착했을 때도. 그 급식실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도. 그 밥이 딱 한 톨 남았을 때도. 그때마다 나는 그 아이를 딱 하루만이라도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도리질 쳤지만, 도리질 치면 칠수록 그건 이미 떠올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 아이가 1번에서 삭제된 그날 이후 나는 그 도리질을 단 하루도 거를 수 없었다. 1은 어디에나 있었다. 앞에서 1등이 있고 뒤에서 1등이 있듯 1은 갖다 붙이기 나름이었다. 요즘 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 면도 시간, 거울 속에서 마주하는 수염이야말로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1의 쓰나미였다. 도리질 치며 올라탄 1번 버스 안에선 이런 노래가 반복 재생되기도 했다. 위 아 더 월드♪ 으흐흠으흠……
어쨌든 현 내 1번은 도다리다. 이름 한번 생동감 넘치는 도다리. 그 아이가 내 1번에서 삭제된 그날, 나는 그 자리에 다시금 도다리를 저장했다. 도다리는 내 1번에서 슬그머니 밀려난 자신이 아무 계산 없이 그 자리를 되찾았다는 사실을 3년이 지난 지금도 모른다. 도다리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내 슬픔을 가장 비밀로 하고 싶지만, 꼭 털어놓아야 한다면 제하고 제하고 마지막으로 남을 사람.
"이상 무, 자비."
"이상 무, 도다리."
하도 안 받아서 막 끊으려는데 멀찍이서 도다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 무'는 나는 지금 괜찮다는 우리만의 신호. 도다리는 언젠가부터 여보세요 대신 '이상 무'로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엔 그게 뭐냐고 껄껄껄 놀렸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안 하는 게 더 웃기다. 웃겨서 따라 해본 게 습관이 되었다.
도다리와 나는 무려 열여덟 살의 나이 차이에도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옹알이도 대충 건너뛴 우리 자비가 마침내 '도다리'를 발음하며 말을 튼 건 기적이라며, 도다리는 당시 돌쟁이이던 내가 앞으로도 쭉 자신을 이름 그대로 불러주길 바랐다. 지금도 말한다. 네가 아무리 커져도 하얗게 빛나던 그날의 작디작은 앞니를 잊을 순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도다리를 도다리라 불러왔고, 도다리는 나의 도다리가 되어왔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유일한 의미로 스며들듯 말이다. 도다리는 내게 단순한 이름이 아닌 엄마, 할머니, 언니와 같은 단 하나의 호칭이다. 우리가 진짜 피를 나눈 건 아니지만.
"자비, 별일 없지?"
"도다리히이…… 별일으은…… 바빠하아……?"
걱정 섞인 목소리를 들으니 말끝이 떨렸다. 이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오늘따라 손님이 많네."
나는 귀에서 휴대전화를 조금 떨어뜨렸다.
"여섯 시 지났잖아…… 센터 문 안 닫아?"
"오늘따라 손님이 많아서."
"못 말려, 끊을게……"
"자비! 잠깐! 내일 집으로 갈게! 우리 자그마치 한 달 만에 만나는 거라고!"
"아…… 아기도 같이 오는 거야……?"
"당연하지!"
"도다리가 아기 낳은 지 벌써 한 달이나 됐구나. 그래…… 한 달…… 시간 참 빠르네……"
도다리의 아기는 내 수염과 거의 동시에 탄생했다.
"자비, 시간이 빠르다는 건…… 크크큭…… 그 한 달 사이 남친이라도 생겼다는 건가?"
아니, 남친? 뜬금없이 웬 남친? 또다시, 그 아이가, 생각났다. 나는 그 아이가 내 남친인 줄 알았으니까. 하아…… 어쩌다 무심결에 걸어버린 전화였지만 진짜 괜히 걸었다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꼬박 2년 동안 등하굣길을 함께한 아이였다. 나를 보호해주겠다며, 죽어서도 나와 함께하겠다며 그 아이가 보내온 손 편지가 내 책상 서랍에 수북했다. 6학년 내내 편지를 보내온 그 아이는 실제로 나와 함께 자기 집에서 꽤 먼 거리의 중학교에 입학했고, 나는 그것으로 그 아이의 사랑이 증명된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그 2년 사이 우리는 자라 있었다. 문제는, 내가 너무 자라버렸다는 거였다.
중1, 열네 살 그때 나는 명량과 노량은 헷갈렸지만 한량의 의미는 정확히 알았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그 아이와 시시덕거리며 느릿느릿 나만의 인생을 사는 중이었다. 나름 심사숙고하는 스타일이라 사랑 앞에서도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내게 고백해온 그 아이를 유심히 지켜보았고, 절대 거짓으로 사랑을 노래할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 함께 등교한 지 거의 2년 만에 내 1번에 저장했으니 말이다. 내 의식은 이렇게 느긋한데, 내 몸은 뭐가 그리 급했던 걸까. 그 아이를 1번에 저장하자마자 시작된 그해 겨울방학, 나는 부리나케 커졌다. 쏜살처럼 다가온 개학날 아침, 지금껏 다정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던 그 아이는 자기보다 까마득히 커져버린 나를 뒷목을 받치며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에선 경멸이 불타올랐다. 내 남친인 줄 알았던 그 아이에게 머지않아 앙증맞고 허여멀건 여친이 생겼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도로 모태 솔로가 되었고, 게다가 지금은 면도크림까지 바르는 처지다……
"자비! 왜 대답이 없어? 뭐야? 진짜 남친이라도 생긴 거야?"
깜짝이야! 전화기 너머에서 도다리가 들뜬 목소리로 적막을 깼다.
매번 이런 식이다. 그 아이가 떠오르는 순간 나는 이렇게 꽉 막힌 굴뚝이 되고 마는 거다. 내 머릿속은 새카매지고 내 가슴속은 그 아이로 매캐해진다. 그 아이는 내 모든 의식의 통로에 문지기처럼 서 있다. 그 아이가 내 남친인 줄 알았던 그때도. 그 아이는 진실로 내 남친이었던 적이 없다고 밝혀진 지금도. 나는 도다리와 통화 중이었다는 사실을 까먹어버렸다. 그 아이는 나를 1로 만들어버린다.
"자비! 조용한 게 수상한데? 진짜 남친 생긴 거야? 남친? 남친? 남친?"
남친, 남친, 남친 이야기 좀 그만! 남친 말고 여친 있냐는 말은 몇 번 들어보긴 했다. 어쩌다 교복 치마를 벗고 쇼트커트에 가르마를 제대로 탄 날이면 꼭.
"손님 많다며. 끊을게."
"자비! 진짜 별일……"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도다리는 먼저 끊는 법이 없으니까. 그게 무엇이든, 더 붙잡고 있다간 그대로 딸려가 버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