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뭐가 공개되기 전인데도 전문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증상을 듣는 내내 그는 한숨으로 추임새를 넣었다. 그때마다 장단이라도 맞추듯 널찍한 내 어깨가 멋대로 덜덜거렸다. 나는 폭삭 쪼그라들었다. 시한부가 된다는 게 이런 심정일까.
"여성의 몸에서 미미하게 분비되어야 할 남성 호르몬이 대량 분비되면 턱은 물론 배와 가슴, 온몸에 털이 나기도 합니다. 드물게……"
드물게.
100세 시대, 남들은 평생에 한 번도 어렵다는 일을 단 18년 사이에 몰아서 경험해온 사람에게 그리 놀라운 단어는 아니었다.
"다모증인가요?"
나는 전문의가 고개를 가로젓길 바라며 물었다. 전문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은총은 개뿔, 신의 총이었다.
다모증. 털이 많이 나는 증상. 남성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는 여성에게 나타날 수 있는 증상. 그러므로 다낭성 난소 증후군 환자에게서도 심심찮게 관찰되는 증상. '여자 수염'에 따라붙는 연관 검색어이자 지레짐작만으로도 모근이 겸손해지는 개과천선형 진단명. 지금도 인터넷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있을 여성 다모증 환자들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돋아났다. 턱, 가슴, 배, 다리, 겨드랑이, 전신…… 몇 안 되는, 세계 각국의 그녀들을 뒤덮어버린 각양각색의 털이.
"혹시 다른 곳에도……?"
"괜찮아요."
사실 턱수염만이 아니었다. 배꼽 근처에서 미세한 털 군락을 발견한 건 바로 어제였다. 그것들이 일정한 분포율로 가슴까지 뻗어나간 걸 확인한 순간 나는 욕실 바닥에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다 씻고 물기를 닦으려던 참이었다. 벗을 때도 씻을 때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나의 어리석음 또한 군락의 실체 못지않은 충격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식구들이 욕실 문을 부술 기세로 흔드는 소리에 깨어났다. 허겁지겁 옷가지부터 챙겨 드는데 하아, 도로 기절할 뻔했다. 마주한 거울 속에 삐뚜름하게 마스크를 걸친 내가 알몸으로 서 있었다. 조금 전 샤워를 마친 내가 가장 먼저 가린 중요 부위는 다름 아닌 수염이었던 거다. 나는 이제 속옷보다도 마스크가 급한 사람이었다. 그 마당에 마스크는 왜 그렇게 작아 보이고 몸은 왜 그렇게 커 보이던지…… 하지만 그때의 그 참담한 심정을, 어쩐지 수염 난 여자보다도 슬퍼 보이는 지금 내 앞의 전문의에게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진 않았다.
전문의는 자기가 다 죽어가는 얼굴로 호르몬 치료를 부추겼다. 그것으로 털이 자라는 속도 정도는 늦춰볼 수 있다고 했다. 영구 제모 시술도 있긴 한데 비용도 비용이지만 '영구'는 환자를 조금 더 안심시키기 위한 수식어일 뿐 호르몬 이상으로 자라기 시작한 털은 현재 의술로는 그 뿌리까지 제거할 방법이 절대적으로 없어, 평생 정기적 레이저 시술을 받아야 한다는 게 그의 최종 소견이었다. 교복 차림인 걸로 봐선 어떻든 학생인 듯하니 10% 에누리해서 레이저 비용은 회당 25만 원 선이라고, 그는 자신 있게 덧붙였다. 어렵사리 모아온 증거를 제시하기도 전에 사형 선고부터 내리다니. 한마디로 전문의에게 다모증이란 불치병이었다.
"어디 좀 볼까요?"
"괜찮아요."
전문의에게 내 깊숙한 내부 사정까지 털어놓지 않은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설사 내가 레이저 시술을 받게 된다고 해도 그에게만은 단 한 올도 맡기고 싶지 않았다. 불치병 진단이 빠른 그는 어쩐지 레이저도 단방향으로 빠르게 휘두를 듯했다. 그에겐 불치병의 산물에 불과할 내 털이, 그가 굴리는 레이저 끝에서 단 한 가닥이라도 제대로 불타버릴 수 있을까……? 여자보다는 남자에 가까운 겉모습만으로도 충분한 모양이었다. 내가 전전긍긍 모아온 빼곡한 증거에 대해 전문의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다.
건물 밖은 한겨울이라곤 믿을 수 없었다. 볕이 작열했다. 훅 끼쳐오는 뜨거운 기운에 눈이 얼얼했다. 나는 해를 등지고 섰다. 달아오르는 뒤통수를 느끼며, 마스크를 내리고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사흘 하고도 반나절을 기른 수염이 손거울을 가득 메웠다. 휘유우우우우- 진료 내내 참았던 한숨이 뭉텅이로 쏟아져 나왔다. 손거울에 우 김이 서렸다. 거울 속 희부연 내 얼굴에서 의문과 확신이 막상막하의 비율로 묻어났다.
"남자야? 여자야?"
뒤통수 쪽에서 으레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전처럼 황급히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두 다리를 균형 있게 넓히며, 손거울을 수염 쪽으로 끌어당겼다. 종아리 알이 저절로 불끈불끈했다. 동시에 손거울 속에선 수염이 서서히 클로즈업되었다. 나는, 나를 그대로 두었다. 멀어지는 것을 멀어지게 두었다. 손거울 안에서 증발해 가는 내 한숨을. 허공에 자욱한 그들의 수군거림을. 작열하는 볕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수염을 쓸어보았다. 생겨나는 갈래들. 저쪽에서 이쪽으로 수염을 쓸어보았다. 사라지는 방향들.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쓸어보며 나는 거울 속 수염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이곳저곳 더듬더듬 짚어보았다. 나는 지금 폭풍 검색 중이었다. 길을. 평생 레이저 시술이 아닌 길을. 면도크림의 문드러짐에서 헤어 나올 길을. 짜자니 눈물 날 것 같고 그냥 두자니 추접스러워서 봐줄 수가 없는 거울 속 대왕 여드름에 한숨짓는 여고생의 삶, 그 보통의 길을.
지금껏 내 성별은 수많은 타인에 의해 추정되었다. 추정했으므로 그들은 모른다. 그들의 결론과는 무관하게 나는 줄곧 여자였다. 털이라면 수염이 나기 전부터도 질색이었던 여자. 그래서 하루가 멀다 않고 정성으로 다리털을 밀어온 여자.
'드물다는 것은 어떻든 존재한다는 것. 드물다는 다모증. 그렇다면 드물게 완치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