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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은 Oct 27. 2024

3화 (1)우리가 피를 나눈 건 아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 휴대전화를 열었다. 단축번호 1번을 길게 눌러 통화를 시도하자 도다리의 전화번호가 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선 도다리가 아닌, 오래전 나를 배신한 그 아이가 떠올랐. 신에게 총을 맞은 이 마당에도 그 아이 타령이라니. 따르르릉 반복되는 신호음을 들으며 나는 낡은 엔진이 매연을 뱉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아이의 배신은 3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이토록 몸서리치게 했다. 말하자면 그 아이는 나의 구 1번이었다.


어린 시절의 순수였다고 치부하기엔 첫사랑의 후폭풍은 거셌다. 아무리 어렸기로서니 나는 어쩌자고 한순간과 평생을 맞바꾸는 대참사를 저질렀던 것일까. 때는 중1의 막바지, 그 아이를 보며 괜스레 웃음 짓고 있는 나를 알아챈 순간 나는 아무 계산 없이 그 아이를 단축번호 1번에 저장하고 말았다. 머지않은 중2의 첫날, 그 아이가 아무 계산 없이 내 1번에서 지워질 줄은 몰랐으니까. 계산을 안 한 것도 아니고 못한 것도 아니고 계산, 그 자체를 몰랐으니까. 그 미련함의 대가로 아무래도 나는 죽을 때까지 그 아이를 떠올려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 아이는 엘리베이터에서 1층을 누를 때도 떠올랐다. 급식실에 1번으로 도착했을 때도. 그 급식실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도. 그 밥이 딱 한 톨 남았을 때도. 그때마다 나는 그 아이를 딱 하루만이라도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도리질 쳤지만, 도리질 치면 칠수록 그건 이미 떠올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 아이가 1번에서 삭제된 그날 이후 나는 그 도리질을 단 하루도 거를 수 없었다. 1은 어디에나 있었다. 앞에서 1등이 있고 뒤에서 1등이 있듯 1은 갖다 붙이기 나름이었다. 요즘 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 면도 시간, 거울 속에서 마주하는 수염이야말로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1의 쓰나미였다. 도리질 치며 올라탄 1번 버스 안에선 이런 노래가 반복 재생되기도 했다. 위 아 더 월드♪ 으흐흠으흠……


어쨌든 현 내 1번은 도다리다. 이름 한번 생동감 넘치는 도다리. 그 아이가 내 1번에서 삭제된 그날, 나는 그 자리에 다시금 도다리를 저장했다. 도다리는 내 1번에서 슬그머니 밀려난 자신이 아무 계산 없이 그 자리를 되찾았다는 사실을 3년이 지난 지금도 모른다. 도다리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슬픔 가장 비밀로 하고 싶지만, 꼭 털어놓아야 한다면 제하고 제하고 마지막으로 남을 사람.


"이상 무, 자비."


"이상 무, 도다리."


하도 안 받아서 막 끊으려는데 멀찍이서 도다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 무'는 나는 지금 괜찮다는 우리만의 신호. 도다리는 언젠가부터 여보세요 대신 '이상 무'로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엔 그게 뭐냐고 껄껄껄 놀렸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안 하는 게 더 웃기다. 웃겨서 따라 해본 게 습관이 되었다.


도다리와 나는 무려 열여덟 살의 나이 차이에도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옹알이도 대충 건너뛴 우리 자비가 마침내 '도다리'를 발음하며 말을 튼 건 기적이라며, 도다리는 당시 돌쟁이이던 내가 앞으로도 쭉 자신을 이름 그대로 불러주길 바랐다. 지금도 말한다. 네가 아무리 커져도 하얗게 빛나던 그날의 작디작은 앞니를 잊을 순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도다리를 도다리라 불러왔고, 도다리는 나의 도다리가 되어왔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유일한 의미로 스며들듯 말이다. 도다리는 내게 단순한 이름이 아닌 엄마, 할머니, 언니와 같은 단 하나의 호칭이다. 우리가 진짜 피를 나눈  아니지만.


"자비, 별일 없지?"


"도다리히이…… 별일으은…… 바빠하아……?"


걱정 섞인 목소리를 들으니 말끝이 떨렸다. 이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오늘따라 손님이 많네."


나는 귀에서 휴대전화를 조금 떨어뜨렸다.


"여섯 시 지났잖아…… 센터 문 안 닫아?"


"오늘따라 손님이 많아서."


"못 말려, 끊을게……"


"자비! 잠깐! 내일 집으로 갈게! 우리 자그마치 한 달 만에 만나는 거라고!"


"아…… 아기도 같이 오는 거야……?"


"당연하지!"


"도다리가 아기 낳은 지 벌써 한 달이나 됐구나. 그래…… 한 달…… 시간 참 빠르네……"


도다리의 아기는 내 수염과 거의 동시에 탄생했다.


"자비, 시간이 빠르다는 건…… 크크큭…… 그 한 달 사이 남친이라도 생겼다는 건가?"


아니, 남친? 뜬금없이 웬 남친? 또다시, 그 아이가, 생각났다. 나는 그 아이가 내 남친인 줄 알았으니까. 하아…… 어쩌다 무심결에 걸어버린 전화였지만 진짜 괜히 걸었다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꼬박 2년 동안 등하굣길을 함께한 아이였다. 나를 보호해주겠다며, 죽어서도 나와 함께하겠다며 그 아이가 보내온 손 편지가 내 책상 서랍에 수북했다. 6학년 내내 편지를 보내온 그 아이는 실제로 나와 함께 자기 집에서 꽤 먼 거리의 중학교에 입학했고, 나는 그것으로 그 아이의 사랑이 증명된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그 2년 사이 우리는 자라 있었다. 문제는, 내가 너무 자라버렸다는 거였다.


중1, 열네 살 그때 나는 명량과 노량은 헷갈렸지만 한량의 의미는 정확히 알았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그 아이와 시시덕거리며 느릿느릿 나만의 인생을 사는 중이었다. 나름 심사숙고하는 스타일이라 사랑 앞에서도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내게 고백해이를 유심히 지켜보았고, 절대 거짓으로 사랑을 노래할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 함께 등교한 지 거의 2년 만에 1번에 저장했으니 말이다. 내 의식은 이렇게 느긋한데, 내 몸은 뭐가 그리 급했던 걸까.  아이를 1번에 저장하자마자 시작된 그해 겨울방학, 나는 부리나케 커졌다. 쏜살처럼 다가온 개학날 아침, 지금껏 다정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던 그 아이는 자기보다 까마득히 커져버린 나를 뒷목을 받치며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에선 경멸이 불타올랐다. 내 남친인 줄 알았던 그 아이에게 머지않아 앙증맞고 허여멀건 여친이 생겼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도로 모태 솔로가 되었고, 게다가 지금은 면도크림까지 바르는 처지다……


"자비! 왜 대답이 없어? 뭐야? 진짜 남친이라도 생긴 거야?"


깜짝이야! 전화기 너머에서 도다리가 들뜬 목소리로 적막을 깼다.


매번 이런 식이다. 아이가 떠오르는 순간 나는 이렇게 막힌 굴뚝이 되고 마는 거. 머릿속은 새카매지고 가슴속은 아이로 매캐해진다. 아이는 모든 의식의 통로에 문지기처럼 있다. 아이가 남친인 알았던 그때도. 아이는 진실로 남친이었던 적이 없다고 밝혀진 지금도. 나는 도다리와 통화 중이었다는 사실을 까먹어버렸다. 아이는 나를 1로 만들어버린다.


"자비! 조용한 게 수상한데? 진짜 남친 생긴 거야? 남친? 남친? 남친?"


남친, 남친, 남친 이야기 좀 그만! 남친 말고 여친 있냐는 말은 몇 번 들어보긴 했다. 어쩌다 교복 치마를 벗고 쇼트커트에 가르마를 제대로 탄 날이면 꼭.


"손님 많다며. 끊을게."


"자비! 진짜 별일……"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도다리는 먼저 끊는 법이 없으니까. 그게 무엇이든, 더 붙잡고 있다간 그대로 딸려가 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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