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출산이 임박한 도다리는 배를 문지르며 나를 찾아왔었다. 이미 진통이 시작된 뒤였다. 임신 말기에 숨쉬기도 벅차 제쳐놓은 센터 업무가 수두룩하다고, 출산과 동시에 하나하나 처리해야 하니 한 달 정도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도다리는 듣는 내가 다 숨이 차게 말했다. 막 수염을 수긍하고 식음을 전폐한 나는 털끝 한 올 삐져나올까, 마스크 위에 목도리까지 감고 도다리의 기습 방문에 응했다. 당황해서 목도리를 진심으로 조여버렸다. 콱 목이 막혀, 조였던 걸 야금야금 푸는데 도다리가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후우우…… 우리 자비…… 반쪽…… 반쪽이 됐네…… 후우우으아……"
"콜록 콜록 콜록…… 콜록……"
패딩을 안 입어도 패딩 같은 살집이 벌써 반토막 났을 리 없었다. 식음 전폐라고 해봐야 딸랑 반나절이었다. 하고픈 말은, 서로가 껄끄러워질 말뿐이었다. 게다가 독감에 걸렸다고 거짓말까지 해버린 참이라 나는 멀뚱멀뚱 억지 기침만 쏟아냈다. 아무리 아파도 말로든 음식물로든 가만두었던 적은 극히 드문 내 입. 이 낯선 거리감에서 어떤 위험을 감지한 걸까.
"자비…… 잊지 마. 절대…… 절대…… 굶으면 안 된다는 거. 후아아…… 너를…… 함부로 내버려 두면…… 후아후아후아…… 안 된다는 거……!"
진통 간격이 눈에 띄게 짧아진 도다리는 내가 다급히 부른 구급차에 실리는 순간까지도 라마즈 호흡 사이에 잔소리를 섞었다.
"아기 낳으면 뼈가 시리대. 콜록…… 이거, 아기 낳기 전부터 차고 있어. 꼭…… 콜록 콜록……"
나는 구급차에 누운 도다리에게 커다란 상자를 던지듯 안겼다. 손목 보호대, 발목 보호대, 팔꿈치 보호대, 무릎 보호대, 허리 보호대, 목 보호대, 머리 보호대, 치아 보호대로 구성된 전신 보호대 8종 세트였다. 이 보호대 세트를 사던 날, 홧김에 들어간 대형마트에서 모아온 대타 코러스 시급을 한 방에 탕진했다. 도다리의 출산 선물 역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 중 하나였지만 모아온 시급을 그것에 몽땅 소비할 계획은 없었다. 다만 어른들의 물가는 상상을 초월했고, 특히나 출산의 고통을 몸소 시연하던 판매원의 호객 행위는 갔던 길을 되돌아올 만큼 수준급이었다. 여러모로 출혈이 컸다. 잘린 날이었다.
"후아…… 후아…… 후아…… 자비……"
"콜록…… 콜록…… 코오오올록……!"
구급차에 누운 도다리가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서슬 퍼런 이 계절도 내 속을 아는 걸까. 순간 강풍이 일었다. 우리 집 담장 너머에 선 플라타너스가 구급차 지붕 위로 와르르 낙엽을 떨궜다. 나는 억지 기침을 쏟아내며 뒤로 물러났다. 도다리에게서 한사코 멀어졌다. 혹 날아갈까, 겨울바람에 매섭게 들썩이는 마스크를 덥석 누르며.
'도다리, 당분간 내가 좀 아플 것 같아. 진짜 불치병에 걸리면 안 되거든. 우리 다시 만나. 서로 최대한 작게 아프고 나서. 그땐 이 모든 고통이 사라졌길…… 순산해야 해……'
한편으론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그게 사라 수녀님 앞이라도 도다리는 비밀을 지켜줄 테니까. 나와 함께 고민할 테니까. 하지만 그건 분명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막 솜털 수준의 수염이 돋기 시작할 때였으므로 무딘 내 몸의 일시적 오류일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었고, 끝내 솜털이 아닌 진짜 수염으로 확정된다고 해도 도다리에게만은 최대한 늦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영영 모르는 것도 괜찮았다. 혼자서 기를 수 있는 데까진 길러봐야 했다.
우리 집은 '자람 보육원'이다. 태어나자마자 자람 보육원에 입소한 나는 도다리와 그녀의 남편 고대로의 합동 후원을 받으며 지금껏 커왔다. 그들의 후원이 일반적인 범위에서 한참 벗어난 하나의 생명 연장과도 같았다는 걸, 얼마 전 종식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춘기의 끝자락에서 겨우 깨달은 참이었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한량의 세월이 쓰라렸다. 장장 18년 동안 그들을 갉아먹으며 이렇게 커졌구나 싶어, 지난날이 한꺼번에 미안해졌다. 더구나 요사이 몰라보게 퀭해진 그들이었다. 내 털이 더하지 않아도 그들의 안팎은 충분히 엉켜 있었고, 이젠 아기까지 낳아야 했다. 자식 하나 보통으로 키우는 데 평균 5억이 든다는 통계에 기함하던 그들의 벙찐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그들의 빠듯한 살림은 불 보듯 뻔한 대량 출혈을 앞두고 있었다.
*
뒷걸음질 치는 나를 향해 손짓하던 도다리가 갑자기 몸을 공처럼 말고 신음했다. 순간적으로 진통이 치달은 듯했다. 도다리의 품에 안긴 전신 보호대 8종 세트 상자가 찌그러졌다.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멀어져 갔다. 도다리와 작별할 때마다 차창 밖에서 오래 흔들리곤 하던 그녀의 하얀 손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