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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은 Oct 27. 2024

4화 (1)그 기다림을 다 합쳐도 모자라는 간절함으로

"다녀왔습니다."


평생 정기 시술이 아닌 길을 고민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도망치려 나아가는 것과 도착하려 나아가는 것의 차이는 획기적이었다. 뒤통수를 맴돌던 타인들의 수군거림. 끝없는 고속도로 같던 하굣길이 오늘은 꼭 운동장 반 바퀴 같았다. 나는 원장실 문을 열었다.


"병원 다녀왔니?"


사라 수녀님이다. 70년 전통을 자랑하는 자람 보육원의 원장님. 이름이 사라일 뿐 강원도 어디쯤에서 태어난 토종 한국인이다. 원장으로서 40년째 자람 보육원을 지켜오고 있고, 올해로 칠십 나이가 되었다. 할머니로 불려야 할 나이지만 이곳 아이들에게 사라 수녀님은 '사수'로 불린다. 사수. 사라 수녀의 줄임말이라는 뜻은 둘째 치고, 자람 보육원에 먼저 발을 들인 입소 선배이니 사수로 모시는 게 당연하다나. 엄밀히 따지면 사수가 우리보다 먼저 들인 건 발이 아닌 탯줄이었지만 말이다.


사수는 태어나자마자 탯줄을 늘어뜨린 채 막 문을 연 이곳, 자람 보육원 담벼락 앞에서 발견되었다. 열아홉 살에 퇴소해 이듬해에 수녀가 되었고, 서른 살에 자람 보육원으로 되돌아와 2대 원장이 되었다. 설립자인 1대 원장님이 갑작스레 작고하시는 와중에도 딱 사수를 지목해 남긴 유언이 큰 영향을 주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발견 당시 아기 사수는 마치 어떤 기도를 하듯 자기 탯줄을 부여잡고 있었다고 한다. 1대 원장님의 비망록에 생생히 기록된 실이다. 자신이 자람 보육원 앞에서 발견된 거나…… 탯줄을 동아줄처럼 붙잡고 있었던 거나……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건 한낱 인간은 헤아릴 수 없는 예수님의 계획임이 분명하다고 사수 본인은 확신에 차 있었지만, 예수님 포함 모든 신의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결론 내렸다. 그건 그냥 굶주림에 지친 한 인간의 무의식이 발현된 것뿐이라고 말이다. 하도 배가 고파 탯줄이라도 입에 넣으려는 순간 아기 사수는 1대 원장님에게 발견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남녀노소 모두가 배곯는 게 일상이었다는 전쟁 직후 아니었나. 그래서일까. 사수의 무의식에는 언제나 밥이 있다. 방금 밥 먹는 거 봐놓고 언제 밥 먹을 거냐고 묻는 식이다. 미사에는 지각에도 마지막 한 숟갈은 포기하지 않는 사수였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은 이해해주실 거란다.


"큰 병이라든?"


사수가 원장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이게 다 일어난 거다.


"독감이 아직 안 나았대요."


"아니, 뭔 놈의 독감이 한 달이나 가? 평생 딱 한 번 걸린 독감도 하루 만에 털고 일어난 애가."


나를 올려다보는 사수의 눈초리가 예리하게 빛났다.


"지독하니까 이름도 독감이잖아요.  콜록 콜록 콜록…… 콜록……"


나는 기침을 쥐어짜며 원장실을 빠져나왔다. 긴 복도를 지나 내 방으로 오는 내내 뒤통수가 화끈화끈했다. 쫓아 나온 사수가 멀어지는 내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걱정 반 의심 반 언짢은 눈빛으로.


지난 한 달, 내가 독감 환자를 흉내 내는 사이 사수는 유명 병원을 검색해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먹는 양이 이전의 반의반도 안 되는 것 같은데 몸은 그대로인 게 수상하다고. 독감이 아니라 더 큰 병일지 모른다고. 딱 필요한 타이밍에만 기침이 터진다는 해괴망측한 병은, 칠십 평생 듣도 보도 못했다고. 얼굴 까먹겠다고. 마스크 그거, 언제 벗을 거냐고. 오늘은 급기야 해외 의료진에게까지 손을 뻗친 모양이었다. 사수의 메시지를 열자, 기적의 샘물로 소경 여럿을 눈 뜨게 했다는 어떤 외국인 의사가 나를 향해 너그러이 양팔을 벌렸다. 진짜 안기고 싶을 정도였다. 사진 아래엔 베들레헴이 해시태그 되어 있었다. 하고 많은  중에 예수님의 고향이라니. 멀리 가지 못하는 또한 반나절 이상 보육원을 비워본 적 없는 사라 수녀님의 무의식인 듯했다.


내가 사수에게 수염을 털어놓지 않은 이유는 도다리에게 털어놓지 않은 이유와 그 결이 정반대다. 추진력이 전차급인 사수는 '수염'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요즘 물이 오른 발군의 타자 실력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털 관련 병원을 검색할 것이다. 동시에 초보 원장 시절부터 고수해온 '부딪히면 깨진다' 라는 자신만의 철학을 바탕으로 내 주위를 맴돌며 나를 회유할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실수인 척 검색 결과를 메시지로 보내올 것이고, 나를 마주할 때마다 주름을 세우며 측은하게 웃을 것이다. 그래도 안 되면 수염 난 내 잠든 사진이라도 어떻게든 확보해, 여자의 몸으로 날마다 면도를 해야 하는 이 어린양을 구원해 달라 이 병원 저 병원에 뿌려댈 것이고, 결국엔 내가 내 발로 어떤 병원으로든 걸어 들어가게 해 자발적 치료를 받게 할 것이다. 그래야 내년, 열아홉 살이 된 내가 조금이나마 시름을 덜고 자람 보육원을, 사수의 품을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렇다면 칠십 할머니의 내공에 넘어간 열여덟 조무래기는 베들레헴은 물론 세계 각지의 이 병원 저 병원에 무방비로 노출될 것이고, 몇 안 되는 수염 난 열방의 그녀들처럼 희귀 사례로 분류될 것이다. 그러다 사진이든 실물이든 그 과정에서 남긴 증거 자료가 인터넷 세계에 유출되기라도 한다면 그건, 얼마 남지 않은 내 데뷔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될지도 몰랐다. 내 집 거실에서도 CCTV가 돌아가는 삭막한 세상이었다. 휴우…… 그러고 보니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조금 전 레이저 전문의에게 사흘 동안 기른 수염을 공개하지 않은 건 말이다. 결과적으론 그 병원 어디에도 마스크 벗은 내 모습을 남겨놓지 않았으니까. 증거 인멸. 섣부른 판단이라 치부했던 레이저 전문의의 불치병 진단. 돌이켜 보니 그건, 어떤 신이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어쨌든 그 어떤 신의 한 수라 할만한 탁월한 진로 변경이었다.


사수는 모를 거다. 평생 무언가를 기다려온 내게 이보다 애끓는 기다림은 없었다는 걸. 그 기다림을 다 합쳐도 모자라는 간절함으로 나는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자립의 그날을. 사수의 품을 떠나갈 그날을. 다만, 대형 기획사의 지붕 아래에 화려한 둥지를 틀 그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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