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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은 Oct 27. 2024

4화 (2)지금 할 수 있는 건 늘 해오던 면도뿐이었다

내 방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까지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뒤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보나 마나 사수였다.


- 밥은?


밥. 나는 혹했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던가. 예수님 찬양보다 사수의 입에 더 자주 오르내리는 밥 찬양. 보고 배운 게 그래서인지 내 무의식에도 늘 밥이 있었다.


- 밖에서 먹었어요.


하지만 수염이 난 뒤로 나는  제대로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사흘 반나절을 기른 그것들과 함께라면 더더욱.


- 뻥 금지.


- 속이 안 좋아요.


- 제육덮밥.


'……'


오늘 저녁 메뉴는 제, 제, 제육덮밥인 모양이었다.


처음 면도크림을 바르고 처음 내 의지로 저녁을 굶던 그날 나는 처음으로 방문을 잠갔다. 사수는 잠긴 방문을 새벽녘까지 두드렸다. 끈질긴 노크 소리에 착잡해진 기분으로 겨우 잠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부턴 두드리는 시간이 대놓고 짧아졌다. 그렇게 두드림은 며칠간 계속되었는데 마지막 날은 거의 스침에 가까웠다. 나는 불현듯 걱정이 되어 얼른 마스크를 쓰고 문을 열어보았다.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되짚어가는 사수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보였다. 사수는 자주 멈춰 섰고, 그때마다 눈물을 닦듯 얼굴에 손을 올리곤 비비적거렸다. 나는 가슴께가 짜르르했다. 새카만 수녀복 안에서 꼬챙이처럼 마른 두 다리가 후들후들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봐도 봐도 이상했다. 얼굴에서 손이 내려올 줄 몰랐다. 눈에 뭐가 들어간 게 아니고서야 보육원에 네 살 먹은 동생도 저렇게 정신없이 얼굴을 비비며 울진 않았다. 코너를 돌아나가는 옆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니, 사수는 아무래도 다리가 저린 모양이었다. 곤두선 손가락 하나가 사수의 입과 코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사수는 눈물을 닦는 게 아니라 콧방울에 침을 찍어 바르는 중이었다. 하기야, 가만있어도 뚝뚝 소리가 나는 무릎 관절로 기나긴 보육원 복도를 왕복하는 것만도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 그 다리로 첫날부터 새벽까지 방문을 두드렸으니…… 사수는 여전히 첫날의 여파에 시달리는 듯했다. 사수가 침을 찍어 바른 다음 날부터 그날의 밥상 메뉴가 메시지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제, 제, 제육덮밥이라…… 어떻게, 타협점을 찾아볼까…… 나는 다시 한번 저녁 메뉴를 곱씹어보았다. 그때 연달아 알림이 울렸다.


- 메뉴 정정. 사수표 제육덮밥.


흠, 사수표라니. 드디어 올 것이 온 건가. 사수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운 듯했다.


사수표 제육덮밥. 난생처음 독감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그 겨울 열 40도를 넘나드는 극한에서도 차분히 소화해 낸, 다 죽어버린 내 입맛을 되살린 유일한 음식. 고추장 제육덮밥은 평소에도 자주 접하는 메뉴였지만, 사수표 수제 간장을 기본양념으로 한 사수표 제육덮밥은 사수가 직접 발품 팔아 떼어 온 1등급 국산 고기로 만들었고, 숙성 과정만도 이틀이 넘게 걸려 쉽게 맛볼 수 없는 메뉴였다. 맛은 뭐, 리필했다. 많이.


수염을 수긍함과 동시에 아침과 점심은 거의 굶었고 저녁은  편의점 음식으로 때웠다. 우리 자비가 드디어 진정한 다이어트를 시작했구나, 쌍수를 들고 반색하던 사수는 식구 하나가 일주일 넘게 밥상머리에 나타나지 않자 그날의 메뉴 메시지에 씁쓸한 한마디를 덧붙이기 시작했다. 부딪히면 깨지니까, 극단의 청유형 말투를 썼다.


-자비 너 환장하는 부대찌개.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식당으로 튀어와 주겠니?


-자비 너 자다가도 일어나는 생돼지 김치찌개. 협조 안 할 거면 당장 나가주겠니?


-자비 너 후식으로 즐겨 먹는 차돌박이 국수. 다이어트? 개나 주겠니? 효과도 없는 거.


열두 첩 음식 대군이 공격해 봐라. 수염 난 여자는 이제 무서울 게 없었다.


-췌! 갈 데 없을까 봐요? 여기 아니면 뭐, 내가 어디 가서 굶어 죽기라도 할까 봐요?


한껏 냉랭해진 분위기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 건 이때부터였다. 연일 규탄의 메시지를 던져온 사수가 갑자기 가슴 몽글몽글해지는 한마디로 나를 구워삶기 시작한 거다.


-밥, 갖다 놨어.


사수는 그날부로 급회전했다. 메뉴 메시지를 보내오는 것은 물론 날마다 내 방문 앞에 손수 저녁밥을 배달했다. 편의점 음식을 먹지 않게 돼 좋았지만 나는 평소의 반도 못 먹고 남기기 일쑤였다. 수염 안 나본 여자는 모르는 설움을 밥과 함께 삼키다 보면 그렇게 퍽퍽할 수 없었다. 설움에도 암수가 있다면 암컷으로도 수컷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자웅동체가 아닐까. 설움은 번식 속도가 엄청났다. 순식간에 내 안에 똬리를 틀곤, 새카맣게 알을 까며 나를 잠식해 나갔다. 한 숟갈 뜰 의욕도 없어 배달 밥상을 문밖에 그대로 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사수는 저 방문 너머에서 콧방울에 침을 찍어 바르며 서 있을 것만 같았다. 선뜻 노크하지 못한 채……


나는 방문이 잘 잠겼는지 문고리를 흔들어 다시 확인했다. 거울 앞에 서서 마스크를 벗었다. 인중이 아침보다 확실히 거뭇거뭇했다. 막 점처럼 돋아난 콧수염도 두어 가닥 보였다. 이건 아까 산부인과에서 나와 땡볕 아래서 비춰봤을 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사흘 만에 콧수염까지…… 완벽히 뿌리 뽑기까진 매우 느슨한 여유가 필요할 듯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늘 해오던 면도뿐이었다.


지난 한 달, 나는 이른 새벽 공동욕실 문을 걸어 잠그고 다리털을 밀어온 내공으로 수염을 밀어왔다. 자고로 면도란 시험 답안지를 검토하듯 재확인에 재확인을 거듭해야 하는 까다로운 작업이었고, 서둘렀다간 베이기 십상이었으므로 면도날을 쥔 내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 아직 베여본 적은 없지만 언제나 베이지 않는 것이 목표였다. 다리털도 아닌 수염을 밀다 피까지 본다면 그건, 두피에 뾰루지 마를 날 없던 언젠가처럼 또다시 사람 사는 게 아닐 터였다. 그러므로 면도 한 번엔 오랜 독자적 시간이 요구되었다. 누가 쳐들어오는 건 아닐까, 단단히 잠갔음에도 불구하고 면도하다 말고 문에 귀를 대보느라 왔다 갔다 하는 시간도 꽤 되었다. 보육원 식구들이 한창 식당이며 욕실에 들락날락하는 지금 같은 저녁 시간대엔 애당초 접어놓아야 할 킬러 문항이었다.


'때를 기다리자.'


일단 침대에 누웠다. 끼이이이익- 매트리스가 한참 내려앉았다. 꼭 실질적 무게 때문만은 아니었던 게, 방바닥까지 꺼져버린 내 몸이 오히려 매트리스를 떠받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오후 두 시에 조퇴해 저녁때까지 종종거렸더니 발가락까지 저릿저릿했다. 또 쥐 났다고, 툭하면 종아리를 주무르던 도다리. 도다리가 자주 쉬며 걷는 이유를, 희미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그나저나…… 킁…… 킁……


킁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잠긴 문틈으로 짭조름한 간장 냄새가 흘러들었다. 아아아, 사수표 제육덮밥. 냄새의 농도로 미루어 사수는 이제 막 볶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곤 그 숨을 도로 길게 내쉬어보았다. 실로 오랜만에 온몸 구석구석으로 저녁의 기운이 퍼져나갔다. 하교 뒤 침대에 널브러져 맡는 저녁밥 지어지는 냄새. 문틈을 솔솔 파고들어  뚫린  콧구멍을 간지럽히던 그 냄새는, 지금 내가 가장 안전한 곳에 다리를 뻗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기에 충분했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수염을 들킬지 몰라, 불안해서 잘 때도 마스크를 쓰는 지금은 마음 놓고 맡을 수도 없는 지난날의 향취일 뿐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냄새와는 무관하게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건, 하루가 얼추 마무리되어 가는 이 시간쯤이면 온몸이 노곤해진다는 . 내 눈은 어느새 감겨 있었다. 사수표 제육덮밥에 첨가되는 양념 하나하나를 오로지 냄새로 헤아리며, 나는 그렇게 지난날의 상념 속으로 빠져들어 다. 저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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