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한 달을 연예인 가십과 담을 쌓고 살았다. 대신 날마다 건강 혹은 질병 카테고리를 뒤졌다. 최초의 검색어는 '여자 수염'이었다. 여자 수염은 온갖 질병과 암, 신체 여러 기관과 장기를 거쳐 난소에까지 다다랐다.
다낭성 난소 증후군!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더듬었다. 여전히 두툼했다. 그런데 여기서 2년 전보다 더한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 그 변화 때문에 수염이 날 수도 있다고? 처음 접하는 정보였다.
내가 2년 전부터 앓아온 다낭성 난소 증후군은 가임기 여성에게 흔히 나타나는 내분비계 호르몬 질환으로써 진행 강도에 따라 여성 호르몬보다 남성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고 그로 인해 무월경, 무배란, 비만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당시 진단을 내린 산부인과 의사는 설명했었다. 심각한 상태는 아니니 어떤 급격한 변화가 느껴지면 다시 오든가, 하라는 당부와 함께.
심각한 상태는 아니라는 부분이 유난히 확대되어 가슴속에 저장되었다. 상남자라 오해받으면서도, 지나치게 건강히 성장할 뿐 생사를 넘나들 만큼의 위중한 신체적 변화는 없었기에 나머지 설명은 제쳐놓고 살았다. 비록 또래보다 월등한 속도로 키가 크고 살이 쪄가긴 했지만 여성성 충만한 십 대 소녀가 그 원인을 남성 호르몬에서 찾는다? 그건 상상 속에서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일, 사라 수녀님 말마따나 성모 마리아께서 둘째 낳을 일이었다.
다낭성 난소 증후군, 그 시작은 생리불순이었다. 석 달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기에 덜컥 겁이 났다. 바로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난생처음 그 문을 열었을 때의 서늘한 공기를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한구석이 헛헛해진다. 그때 나이 열여섯, 교복을 입고 홀로 산부인과에 들어선 내게 쏟아지던 눈빛. 여자들의 눈빛. 누군가는 눈꼬리를 번득이며 혀를 찼고, 누군가는 내가 자신의 사고뭉치 친인척이라도 되는 양 죽일 듯 노려보았다. 남다르게 배가 좀 나왔기로서니 그곳에서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이러나저러나 이번 생은 틀려먹은 낙오자로 단정되는 듯했다.
'저기요, 자세히 좀 봐요. 이 배가 그 밴가. 나, 모태 솔로거든요.'
그로부터 2년이 흘렀고, 나는 여전히 모태 솔로인 채 고2가 되었다.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또한 여전했다. 넉 달 전 그날까진. 그때 나는 처음으로 무월경을 경험했다.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게 아예 사라져버린 것이다. 의사가 말한 '급격한 변화'가 찾아왔음을 직감했지만, 차일피일 진료를 미뤘다. 막 방과 후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때여서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다는 건, 솔직히 핑계다.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세월에 내성이 생겨버린 건지 하나도 겁이 나지 않았다. 동반되는 신체적 통증이 없었고, 사람들 눈에 띌 만한 겉으로 드러나는 병변도 없어서 안일하게 여겨졌다. 이미 격변에 격변을 거친 몸, 그거 하나 더해진다고 뭐. 그러다 한 달 전, 연예 카테고리나 뒤적이다 털 종류인 것만은 확실한 그걸 발견하고 만 거다.
일단 마스크로 가리고 등교했다. 하교 뒤 자세히 관찰한 결과, 아침까지만 해도 보드랍게 뾰족하던 그것들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쓸어보는 손끝이 따가울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이틀, 사흘, 나흘째가 되던 날 거울 속 상황은 거뭇하지 않은 내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암담했고 나는 그것들이 수염임을, 게다가 분명하게 자라나고 있음을 수긍해야만 했다. 처음 면도크림에 손을 댔다. 후회되었다. 넉 달 전 무월경 증상이 나타났을 때 바로 병원을 찾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돈 몇 푼 버는 대신 빚을 내서라도 치료를 받았더라면. 지금의 나를, 불투명한 꿈이 아닌 불 보듯 뻔한 현실에 투자했더라면. 그때부터 나는 먹고 마시는 일 등 기본적인 생존권을 보장받아야 할 때를 제외하곤 반드시 마스크를 썼고, 그 때문에 어렵사리 구한 방과 후 아르바이트를 그만둬야 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 연예 기획사의 이름에 점 하나를 찍어 간판만 얼핏 보면 그 대형 기획사의 분점인가,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자그마한 신생 기획사. 그 기획사에 소속된 어느 무명 가수의 신곡을 녹음하던 중 무명 코러스 한 명이 갑자기 쓰러졌다. 나는 몇 번의 오디션을 거쳐 그 무명 코러스의 대타 자격으로 생애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길 잃은 야생마의 포효가 떠오르는, 거칠면서도 우수에 찬 내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며 프로듀서는 다른 무명 가수의 앨범에도 참여할 기회를 주었다. 어차피 실제 무대가 아닌 녹음실에서만 작업할 것이므로 나머지 신체 조건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부연이 붙었다. 수염이 난 건 그로부터 얼마 뒤였고, 마스크 쓰고 뭔 노래냐고 윽박지르는 프로듀서의 등쌀에 벗을까 말까 머뭇거리다 나는 잘렸다. 5중 구조 특대형 필터가 걸러버린 야생마의 포효는 이제 이빨 빠진 들짐승의 하품에 불과했다.
수염을 수긍한 뒤론 사실 새벽마다 면도를 해왔다. 턱에 면도크림을 문지를 때 내 속이 같이 문드러지는 것 말곤 수염은 생존 자체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새벽에 밀면 저녁까진 너끈했다. 굳이 마스크를 쓴 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내가 잠깐의 휴식 시간에까지 마스크를 벗을 수 없었던 건, 오로지 불안해서였다. 불안에는 내성이 없었다. 혹 덜 밀린 곳이 있진 않을까. 저녁이 오기 전에 그곳이 미리 거뭇해져 버리는 건 아닐까. 그사이 그걸 누가 보면 어쩌지…… 초조해서 연속 삑사리가 났다. 내게 마스크는 일종의 안정제였다. 마스크를 썼더니 삑사리가 적어도 반은 줄었다.
어쨌거나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전문의의 정확한 진단이었다. 봐도 봐도 이건 수염이지만, 만에 하나 수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배제해버릴 순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가도 가도 빗발은 굵어지지만 가다 보면 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치겠지. 어린 시절 자그맣던 내 몸은 결국 이렇게나 커졌지만, 따지고 보면 만에 하나, 어쩌면 그 이상의 확률로 인간의 보편적 발육 기준을 꾸준히 초월해온 것 아닌가.
당장 내원 준비에 돌입했다. 지난 한 달 동안 욕실에 숨어 강행해온 면도를 단칼에 그만두었다. 행여 삐져나오진 않을까, 시시각각 엄습해 오는 발각의 공포와 싸우며 장장 사흘 동안 마스크 안에 수염을 길렀다. 바로 오늘, 전문의에게 증거로 내밀기 위해서였다. 괜찮다는 증거. 이건 솜털이야, 솜털이 좀 길어진 것뿐이야, 솜털이 잠깐 까매진 것뿐이야, 가수 데뷔는 문제없어. 그러니까, 별거 아냐. 어떤 한 마디를 나는 꼭 들어야만 했다. 신의 은총과도 같다는 한마디를.
2년 만에 다시 그 문 앞에 섰다. 홀로 산부인과로 들어서는 교복 차림의 내게 여기저기서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나는 과녁처럼 서 있었지만, 어떤 시선에도 명중되진 않았다. 오히려 마스크 위 두 눈에 힘을 단단히 주고 날아드는 그녀들의 시선을 반사시키기 바빴다.
나는 수염 난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