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수염은, 무덤에서도 잔디인 양 자라날 것 같았다
나는 주머니 속 손거울을 감아쥐었다. 동시에 재빠른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다. 뒷골목은 고요했고, 혹시나 해 둘러본 개구멍엔 얼씬대는 그림자 하나 없었다. 비로소 내가 혼자임을 확신한 나는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가만히, 특대형 마스크를 벗어 내렸다. 어제보다 새카매진 한 여자의 턱이 손거울에 꽉 들어찼다. 거울 속 두 눈을 나는 그대로 치켜떴다. 정신없이 달려 내려온 내리막길이 잿빛 하늘가로 뻗어 있었다. 꼭, 달려오는 기차 앞에 선 기분이었다.
'정신 차려, 꿈 아니니까.'
꿈일 리 없었다. 벌써 한 달째였다. 마스크와 함께 호흡하는 것도, 중증 독감 환자를 흉내 내는 것도, 툭하면 굶는 것도, 하굣길 모퉁이에 숨어 남몰래 손거울에 턱수염을 비춰보는 것도.
엊그제만 해도 모래알처럼 까슬하던 게 제법 자라 윤기를 냈다. 풀뿌리처럼 엉키기 시작한 몇 가닥도 눈에 띄었다. 없애려 하면 할수록 굵고 뻣뻣하게 번져나가는 게 수염은, 마치 불리기 싫은 끔찍한 별명 같았다. 무덤에서도 잔디인 양 자라날 것 같았다.
시험지에 빗발치는 빨간 금처럼 내게로 쏟아지는 편견의 잣대들. 넌 답이 없어, 제멋대로 근엄한 시선들. 칼날 같은 그것들에 찔리면 찔리는 대로, 베이면 베이는 대로 덤덤히 걸어온 나였다. 그러나 가도 가도 빗발은 그치지 않으니 어쩌란 말인가. 작정하고 퍼붓는 이 집중 호우를 무슨 수로 감당하란 말인가. 털이라니. 수염이라니. 물샐틈없이 마스크를 여미며 나는 또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 산부인과를 향해.
*
갑자기 턱이 거뭇거뭇해진 게 단순 피부 질환이 아닌 털 관련 문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의심했던 건 한 달 전이었다. 고민 끝에 휴대전화 검색창을 열었는데, 막상 '수염'이라고 치려니 헛웃음이 났다. 뼛속까지 여자인 내게 수염?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로 연예 카테고리로 넘어갔다. 내 최애 아이돌이 열애 중이라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물론 다음날 아침 거울 속 내 모습이 전해온 비보에 비하면 그건 새 발의 피였지만.
하룻밤 새 턱은 몰라보게 새카매져 있었고, 그곳엔 뾰족한 것들이 다양한 높낮이로 고르게 돋아나 있었다. 새카만 그것의 본질이 무엇이든 털 종류인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연예인 가십이나 뒤적였다니, 코가 매웠다. 간절할 때면 으레 떠오르는 사라 수녀님의 미소가 허공 너머로 너울져갔다. 무엇이든 붙잡고 싶었으니까.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이 검은 것을 도로 거둬가 주신다면, 본래의 저를 되돌려만 주신다면 평생 저와 같은 불우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겠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기도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지옥 불에 떨어진 영혼들이 뒤늦게 회개하며 절규하는 영화를 볼 때도 오징어만 씹던 게 바로 내 입이었다. 입만 나불나불하는 이런 기도가 먹힐까. 이런 게 지옥의 맛일까. 일이 터진 뒤의 기도는 어떤 기도 못지않게 간절했지만 이보다 비현실적일 순 없었다. 평생 저와 같은 사람들을 도우며 살겠다니. 열여덟 청춘에 수염까지 기르게 된 불우한 소녀가 세계에 또 있을까. 있대도, 몇이나 될까.
표준 이상인 머리 크기, 표준 이하인 목 길이, 간당간당하게 표준인 사각턱, 웬만한 남친을 쏙 집어넣고도 남을 만큼 너른 품과 가을철 암게처럼 알이 꽉 찬 종아리까지. 여자라면 하나만 가져도 죽고 싶어 진다는 신체 조건을 쏙쏙 골라 갖춘 나는 이깟 털이 아니라도 이미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남자야? 여자야?"
특히 초면의 그들은 물어왔다. 앞에서 직접 묻는 이는 없었고, 하나 같이 나를 지나친 뒤 뒤통수 쪽에서 얼버무렸다. 상처받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 나는 그 어떤 여성과 대적해도 밀리지 않을, 내면 깊이에서 끓어오르는 이 여성성을 까보일 수 없다는 게 북받쳤다. 여자답게 보이기 위해 오랜 세월 고수해온 쇼트커트 대신 긴 머리칼을 붙여볼까, 교복 치마는 깨끗하게 찢어버리고 바지만 입어 남자인 양 위장해 볼까, 숱한 날을 고뇌해 왔다. 하지만 눈물 젖은 그 밤들은 결국 송두리째 전면 백지화되고 말았다. 나는 쇼트커트도 치마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마 숨이 붙어 있는 날까진 끈덕지게 이대로 살아야 할 터였다. 내 몸은, 그런 몸이었다.
인간의 생리현상 중엔 땀이 있다. 나는 땀이 참 많이 있다. 천만다행으로 냄새는 안 나지만 '많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알 수 없는 양이다. 여자에 얼마, 남자에 손모가지. 날이면 날마다 가당찮은 내기의 희생양이 되는 게 억울해서 언젠가 목덜미까지 머리칼을 길렀었는데 땀띠로 생고생을 했었다. 길러온 시간이 아까워 묶기 시작했더니 그놈의 땀에 못 이겨 두피에 뾰루지가 '많이'도 돋았다. 잘라버리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머리칼 사이로 숭덩숭덩 바람이 드나드니, 그제야 도로 사람 사는 것 같았다. 목덜미를 벌겋게 뒤덮은 게 전염병 수포라도 되는 양 혐오하는 시선은 새 출발의 덤이었다.
남자로 위장해 바지를 입고 등교할 때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하체에 통풍이 원활하지 않아 평소보다 땀이 몇 배는 더 났다. 엉덩이는 어디에 붙이기만 하면 축축해져 왔고, 그 엉덩이로 장시간 의자에 앉아 수업을 듣는다는 건 그 자체가 시험이었다. 이미 과부하에 걸려 등하교도 간당간당하게 처리해 내는 머릿속에까지 땀이 차오르는 듯했다. 따라서 그날도 수업에는 전혀 집중할 수 없었고, 안 그래도 답답한 석차는 끝을 모르고 답답해졌다. 그러나 내가 치마를 포기할 수 없는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유.
타인의 이목이 쏠리는 그 순간 치마를 입고 있어야 그들의 시선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었다. "변태야? 남자가 치마를 입었어!"라고 육성으로 징그러워하는 극소수를 빼면, 대부분은 빠르게 고개를 주억이며 나를 지나쳤다. 나를 위아래로 훑는 그들의 눈빛은 인파 속 나를 발견한 그 순간부터 내 곁을 지나치는 순간까지 온통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그 눈빛들에 답했다. 낮고 깊고 굵고 무거운 목소리까지 노출되면 대충 지나치는 그들까지도 나를 진짜 남자로 확신하겠다 싶어, 입을 꾹 다물고 속으로만. 가슴속에서 실시간으로 재생되는 걸걸함으로.
'저기요, 자세히 좀 봐요. 나 여자거든요. 마음만은 여리여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