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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Apr 06. 2021

아내의 은밀한(?) 취미생활


시작은 이러했다.


금요일 오후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목요일에 주문한 식물이 발송되었다는 문자였다.



'잉? 설마? 아닐 거야.'

처음 문자를 받았을 때는 잠깐 거짓(?) 발송 문자라고 생각했다. 옥션 같은 플랫폼에서는 주문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발송 문자를 보낸다. 발송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고객들의 항의를 방지하기 위함인지 취소를 막기 위함인지는 모르겠지만 간혹 그런 경우를 겪었다. 하지만 이번엔 옥션이 아닌 네이버 쇼핑에서 주문을 한 거라 경우가 달랐다. 이런.. 분명 주문하며 업체 측에 토요일에는 받을 수 없으니 목요일에 발송할 수 없으면 월요일에 발송해 달라고 글을 남겼고 월요일에 잘 챙겨 발송하겠다는 답글도 받았는데 발송을 해버리다니.. 물론 주문자의 요구를 일일이 들어주기에는 주문이 많을 거란 것을 알지만 '알겠다'라고 답글까지 주시고선 발송해 버리시다니 잠깐 원망하는 맘이 스쳤다. 하지만 이미 떠난 택배를 어떻게 하겠는가? 들키지 않고 잘 받아보는 수밖에.


작년 겨울 극심한 식태기로 식물들을 많이 떠난 보낸 후 이제 가드닝은 선반 두어 개만 남기고 접어야겠다 생각했는데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에 지름신이 도져 버렸다. 잘 참는 분도 계시긴 하지만 많은 꽃순이들이 봄의 지름신에게 지고 만다. 언젠가 식물 카페에 “잠결에 결제했나 봐요. 오늘 식물이 온데요.”라는 글이 말해주듯 봄의 지름신은 몹시도 위험하다. ^^

한참 이 택배를 어떻게 받을 것인가 고민하던 차에 핸드폰에 새 글 알람이 떴다.



옴마야~~  또 다른 식물이 출발했단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나는 목요일에 두 곳에서 식물을 주문했고 월요일 배송을 부탁했는데 모두 금요일에 발송을 했다는 것이다.



대형 사고다!!!

하나면 어찌어찌해보겠는데 2박스는.. ^^;;

꽃님들에게 아이디어를 부탁드렸다.

나눔이라고 한다, 교환이라고 한다, 남편을 심부름 보낸다 등등 몇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모두 운에 맡겨야 하는 방법들 뿐, 딱히 묘수가 나오지는 않았다. 그나마 두 택배가 같은 우체국 택배를 이용해 온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대책 없이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아침부터 남편이 설레는 목소리로 말했다.

“배달 준비라고 뜨는 거면 오늘 오는 건가?”

“아마도..”

“우리, 우체국 택배는 일찍 오지 않나?”

‘응? 우체국 택배?’

“랜덤박스 오늘 온다네. 뭐가 들었으려나..”


헉.. 망했다!!

목요일에 세차 카페에서 랜덤 박스를 주문한 남편도 오늘 택배를 받는데 마침 내 택배와 같은 우체국 택배로 온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어제까진 일정 목적(연기로 도넛 만들기 같은)을 위해 수시로 집을 드나드는 남편이 문 앞에서 내 식물 택배와 조우할 확률이 50%였다면 이제는 여기에 자신의 택배 도착 알림 문자를 받고 맞이하러 나갔다 덤으로 내 택배까지 들고 들어올 확률까지 더해져 남편에게 들킬 확률이 90%로 높아졌다는 뜻이었다.


‘자자.. 침착해야 돼. 내가 뭐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잖아. 명품백을 산 것도 아니고. 괜찮아.’라고 마음을 진정시켜봤지만 택배 박스 3개를 든 남편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걸리면 최소 3개월은 을 아니지 정의 입장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염없는 기다림의 시간이 흘렀다. 하필 배달 완료 문자만 보내시는 우체국 택배라니. 배달 완료 문자가 오기 전에는 택배가 왔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편은 수시로 문밖을 확인했다. 그때마다 나는 행여 남편 손에 택배 상자가 들려있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런 남편을 지켜봤다. 에휴.. 이게 이렇게까지 가슴 졸일 일인가??


오후 4시가 지나가면서 안 되겠다 싶어 남편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자기야. 그 랜덤박스, 오면 내가 먼저 뜯어봐도 돼?”

랜덤 박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택배를 내가 먼저 받아보기 위한 구실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 대신 무슨 색인지만 알려줘.”

“알았어.”


내 시커먼 속내를 알리 없는 남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좀 미안하네.’

오후 5시 반. 이제는 택배가 오늘 중으로 도착하지 않을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른 것과 달리 식물은 배송지연 시 거의 폐기 처분시켜야 한다. 이런 게 사서 고생이구나. ㅜㅜ


택배를 기다리다 지쳤는지 그냥 지루했는지 남편은 TV를 보다 잠이 들었다. 쌔근쌔근 나에게 심신의 안정을 주는 남편의 가벼운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애나 남편이나 잘 때가 제일 이쁘다) 김밥을 싸던 그때 드디어 우체국 택배의 배송 완료 알람이 떴다. 나이스 타이밍~~~ 행여 남편이 깰라 빛의 속도로 현관으로 달려가 문 앞에 고이 쌓여있는 택배 박스 3개를 현관 안으로 옮겼다. 평소보다 날렵한 엄마의 몸놀림에 화장실 가던 딸이 따라 나왔다.

"다 아빠 꺼야?"

"쉿. 하나만.. “

대충 알겠다는 눈빛으로 딸이 말했다.

“어떻게 할까?”

“기다려봐.”


남편의 택배만 골라 고이 잠든 남편 옆에 내려놓고 들키면 안 되는 내 택배는 베란다 구석,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겼다. 휴~~ 성공. 그렇게 하루 종일 애타던 내 택배 받기 미션은 무사히 끝이 났다.


음.. 이쯤되니 내 취미가 가드닝인지 몰래 택배받기인지 좀 헷갈리긴 한다.







모두 잠든 밤, 으슥한 조명 아래서 택배를 개봉했다.

정성껏 포장된 식물들이 보였다.

꽃봉오리를 주렁주렁 달고 온 후쿠시아와 단아한 수형의 미니 바이올렛의 모습이 마음 졸였던 하루를 보상해 주는 것 같았다.




처음 식물을 기르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남편은 나의 취미생활을 적극 지원해 주었었다. 그 당시 내게 식물을 기른다는 것은 더 이상 이사를 다니지 않아도 되는 우리 집이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삿짐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식물이다. 책은 무게때문에 번거로워하기는 하지만 짐의 양을 크게 좌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식물은 위로 적재할 수 없는데다 흔들리면서 흙이 쏟아질 수 있어 이사시 대부분 처분하거나 따로 옮겨야 한다. 그래서 전셋집을 전전하는 동안 나는 가구도, 식물도 두지 못했다. 이런 사정을 알기에 남편도 나의 소박한(?) 취미생활을 흔쾌히 응원해 주었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게 되고 베란다에 식물들이 넘쳐나면서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살면서 늘 눈치를 보며 살았기에 ‘눈치를 본다’는 것에 있어서는 억울한 면이 많았다. 그런데 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억울함이 없다. ‘눈치를 보다’라는 말에 ‘지나치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면 이번에는 눈치를 봐야함에 틀림없으라. 올해는 꼭 식물들을 줄여야지. 그만하면 자가보유의 기쁨을 충분히 누리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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