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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Oct 18. 2022

단순 노동마저 단순하지 않아서..


드라마 속 대학생들의 모습도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대학생이라고 하면 '좀 사는 집'이라는 인식이 있던 시기에는 드라마 속 주인공은 '주경야독'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놀고먹는 대학생'이라는 말이 나오던 시기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도 잘하는 대학생이 주인공이 되었다. 언제나 드라마 속 주인공은 다수보다는 소수에 속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했다. 단순노동으로 돈 버는 것이 꿈일 만큼 단순한 뇌를 가졌던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도 잘하는 대학생이 로망이었다. 멍청하기는.. 그냥 놀면서 공부 잘하는 대학생이 로망이었어야 하는데 드라마 속에는 그런 대학생을 전부 개망나니로 묘사를 했으니 잘못된 로망의 원인을 제공한 드라마 작가들을 원망해야 하나.


어찌 되었건 우리 집은 드라마 속 주인공의 집보다는 사정이 나았지만 개망나니 대학생의 집보다는 한참 못 사는 집이라 나의 로망(?)을 이루기에는 완벽한 배경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등록금을 벌어야 하지는 않았지만(사실 벌어야 했는데 그때는 알지 못했다) 또래보다 부족한 용돈은 늘 공부보다 아르바이트에 눈을 돌리게 했었다. 하지만 눈을 돌린 거에 비해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지는 못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나의 아르바이트 조건이 너무 까다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제 파악을 못하기는..


내가 다닌 학교는 서울 집에서 1시간 반 걸리는 곳이었다. 학교는 대학가라고 할 만한 곳이 아니라 학교 근처에서는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고 수업을 마치고 서울로 와야만 했는데 일찍 수업이 끝나는 날은 일찍 끝나서 놀고 싶었고 늦게 끝나는 날은 늦게 끝나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아르바이트는 시간이 맞지 않았고 비정기적인 아르바이트는 수입면에서 안 하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조금 더 효율적이면서 수입은 괜찮은 아르바이트는 없을까 고민 끝에 근로장학생 제도를 알게 되었다. 근로장학생은 주로 교내 도서관이나 식당에 배정되어 근로를 하게 되는데 급여는 적지만 학교 내에서 근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근로시간은 협의가 가능했다.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며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을 보고 20년도 더 된 기억을 되살려 근로장학생을 알아보라고 했다. 나를 닮아 단순노동을 즐기는 아이들에게는 딱이지 싶었다. (뭐 이런 걸 닮고 그래. ㅠㅠ) 그러자 아이는 우리는 소득분위가 높아 해당사항이 없다나. 망할.. 은행과 공동소유의 집과 차를 가진 것뿐인데 국가에서 주는 모든 혜택에서 소외돼야 하다니..








책을 읽는 것보다는 책이 가득 차 있는 서점을 좋아하는 '적독가'인 나는 도서관에 배정되기를 희망했다.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는 것보다 있어 보이기도 하고 노동강도도 도서관이 식당보다 더 쉽다 생각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근로장학생들은 도서관을 희망했는데 추첨운은 그때나 지금이나 없어 난 교내 식당에 배정되었다. 배정되고 난 후에 안 일이지만 도서관에는 없는 것이 식당에는 있었다. 근로 후 주어지는 푸짐한 한 끼 식사는 식당에 배정된 근로장학생들만의 특권이었다. 요건 몰랐지?? ㅋㅋ


교내 식당에서 근로장학생이 하는 일은 점심시간, 학생들이 몰리는 시간에 식판을 닦는 일이었다. 일반 식당 설거지 아르바이트에 비해 그릇이 스텐 식판으로 통일되어 있어  깰 염려가 없는 데다 다양한 모양의 그릇이 아니기 때문에 초보자도 쉽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초반 나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스텐 식판을 설거지통에서 헹구어 건져 올리는 단순한 일이었지만 물의 저항력은 부피가 큰 물체일수록 커지기 때문에 작은 그릇들을 꺼내는 것보다 커다랗고 평평한 스텐 식판을 건져 올리는 일에는 힘이 더 들었다. 나는 시키는 일은 열심히 하는 열정적인 초보였지만 점심시간 몰려드는 식판을 빠르게 처리하기에는 열정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식판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쩔쩔매는 나를 본 조리원 아주머니는 안 되겠다 싶으셨던지 본인의 일을 잠시 미뤄두시고 내 일을 도와주셨다. 순식간에 설거지통 안의 식판들이 깨끗해져 건조대 위로 올라갔다. 내게는 한없이 무거운 식판을 조리원 아주머니는 힘들이지 않고(물론 내 기준에서) 가볍게 건조대 위로 올리셨다. 혹 떼려다 혹 붙이신 아주머니께 죄송해 어쩔 줄 모르니 “처음이라 그래. 하다 보면 요령이 생겨.”라며 나를 위로해 주셨다. '요령이 생긴다'는 말은 내가 단순하다 생각했던 일들에서 종종 듣곤 했던 말이었다. 요령의 정확한 실체는 대부분 알아낼 수 없었지만 단순한 일을 함에 있어 요령은 생각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곤 했다.


같은 일을 반복하는 ‘단순노동’이라도 편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의 심리 때문에 나름대로의 효율적인 방법을 찾게 된다. '단순노동'의 효율적인 방법은 머리와 몸을 함께 사용할 때 찾게 되는 것으로 ‘단순노동’이 사실은 생각만큼 단순하지도 않을뿐더러 몸과 머리를 함께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은 단순노동에 최적화된 인간이라고 자부하던 나에게는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체중의 2.4% 뿐이 되지 않는 뇌에게 너무 많은 일을 강요하는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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