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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Oct 22. 2022

초보 가능, 전공자 우대

 

학창 시절 선생님에 대한 나의 기억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람이었다. 선생님도 사람인지라 아이들의 호응도가 좋은 반에서는 조금 더 재미있게, 조금 더 많은 내용을 알려주게 되고 아이들의 호응도가 낮은 반에서는 웃음기 쏙 뺀 기본적인 내용의 수업이 된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결국 뼈대는 같은 내용을 몇 번씩 반복해야 하는 것이 선생님의 일이었다. 가르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가르치는 대상이 알아들을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그래서 가끔은 농담마저 똑같이 반복해야 하는 것. 그래서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선생님이었다. 세상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대통령', '과학자', '의사', '선생님'이라는 꿈을 갖도록 세뇌받던 시절에도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을 시작했다. 내가 꿈이나 희망 혹은 싫고 좋음을 따질 만큼 신념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깜빡하고 있었다. ^^








나의 첫 학원은 학교 근처에 생긴 오픈 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학원이었다. 처음에는 경력도 없는 나를 뽑아준 것이 감사해 이것저것 둘러볼 여유가 없었는데 몇 달 일하니 하나둘 학원 사정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 근처 시장통 입구에 위치한, 상가건물 2층에 자리 잡은 학원은 규모가 작아 내부가 마치 미로 같았다. 일반 사무실 공간을 칸막이로 구분해 교실을 만들다 보니 절반은 창문이 없는 교실이었고 방음은 하나도 되지 않았으며 복도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았다. 그런데 그 안에 짐은 또 얼마나 어지럽게 쌓여있는지 학원에 들어서면 없던 폐쇄공포증이 생기는 것 같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학원생은 많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내 월급일은 칼같이 지켜주셨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원장님께 진심 감사드린다.



교직이수를 하지 않아 교원자격증이 없어 학교 선생님은 될 수 없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중고등학교 학원강사에게 요구되는 자격증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학원이 자리를 잡아 다르지만 내가 학원강사로 첫발을 내디뎠던 1990년대 후반은 동네 구석구석 ‘보습학원’이라는 간판을 내건 구멍가게 같은 작은 학원들이 마구잡이로 생겨나던 시기였다. 당연히 공급(학원의 수)보다 수요(학원강사의 수)가 많던 시기라 쉽게 학원강사가 될 수 있었다. 벼룩시장 한편에 ‘초보 가능, 전공자 우대’라는 조건으로 수많은 동네 학원들이 강사를 모집했고 그 덕에 학부생이던 나도 쉽게 채용이 될 수 있었다.



‘초보 가능, 전공자 우대’는 사실 보는 이로 하여금 오해와 희망을 가지게 하는 표현이다. ‘초보 가능’이라는 문구를 앞에 두어 초보자들에게도 취업에 대한 희망을 주지만 사실 이 표현의 포인트는 ‘전공자 우대’다. ‘우리는 전공자를 뽑는 거니 전공자가 아닌 사람은 알아서 오지 마시오’의 완곡한 표현이랄까? 전공자를 이길 수 있는 건 경력직뿐.. 가끔은 악의 없는 지나친 친절이 더 아프기도 하다.








학원에는 원장님과 파트타임 강사 두 명이 있었다. 원장님은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결혼 후 학원을 오픈하신 30대 초반의 남자분으로 파트타임 강사 두 명이 맡고 있는 과학과 수학을 제외한 나머지 과목을 가르치셨다. 파트타임 강사 중 한 명은 함께 사법고시를 준비했던 원장님의 선배로 학원이 자리 잡을 때까지 매주 이틀 정도 학원일을 도와주시며 사법고시를 준비하신다고 하셨다. '중학교 수학 그까짓 거~~'라는 느낌으로 껄렁한 옷차림에 더벅머리, 운동복 차림으로 나타나 수업을 하고 가시는 명문대 출신 고시생과는 달리 나는 '내가 이렇게 공부했으면 서울대 갔겠다'싶을 정도로 힘들게 공부하고 학원에 나갔다. 그러면 뭐하누? 애들은 공부와는 담을 쌓은, 그저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에 환호하는 철딱서니들인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선생님이 나보다 많이 아셨던 것은 대학을 나와서가 아니라 가르치기 위해 우리보다 더 많이 공부하셨기 때문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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