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생애 한 번 영광은 있다.
아들아,
공무원 시험준비는 잘 되고 있니?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휴대전화마저 정지시켰다고 하니 걱정은 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오랜만에 너에게 편지를 쓸 수 있어 좋네.
너를 보며 요즘 애들은 요즘 애들 대로 참 살기 힘들어졌다는 생각을 많이 한단다. 영화 같은 데서 보았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때는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이 그래도 자주 들리곤 했단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대학에 가거나 서울의 공장에 취직이라도 하면, 그 친구는 순식간에 마을의 유명인이 되었고, 마을은 그 친구를 위해 입구에 축하 천막을 달고, 잔치를 벌여 온갖 칭찬을 쏟아부어 주고 눈물을 흘리며 좋아했단다. 그 친구가 떠난 후에도, 그 친구의 소식은 마을 입구에 계속 업데이트되었지.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마을에서 매우 유명했는데, 그건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할아버지, 아니, 할아버지의 돼지 덕분이었어. 해마다 온갖 축사업자들을 모아, 한 해의 가축을 겨루는 축제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님까지 참여할 정도로 중대한 자리였는데, 할아버지는 그 영광을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몸살을 앓으신 날까지도 새벽부터 밖에 나가 집안의 가축들을 돌보았다. 결국, 할아버지의 돼지는 가장 털이 곱고, 큰 최상품의 돼지로 선발되어 우리 마을을 빛내주었단다.
이렇게 우리는 늘 열심히 일하고 그 영광과 나름의 명성을 얻으며 살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을 향해 잘 달려간다면, 쉬이 마을의 스타가 되었고, ‘내가 이것을 해냈다’라는 행복과 함께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는 특별함을 누렸지. 그래서, 목표가 생기기만 하면,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 즐거웠어. 그로 인해 이뤄지는 우리의 모든 것들이 특별하다고 믿으며 살았어.
그래서 미안해.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며 중학교 때부터 성인 내내 열심히 공부해 달려왔던 너에게 정말 미안하단다. 서른 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고시원에 들어갔다고 고백하는 너를 보며 엄마는 엄마를 원망했어. 우리 때의 영광을 쉬이 누리지 못하는 네 세대의 아픔은 우리 때문이겠지. 뉴스에서 보던 현실이 우리 아들에게 닥치자 그제야 실감이 났단다. 하루하루 옆을 둘러보지 않고 축적된 세월에 세상이 이리된 것이 아닌지. 좋은 길을, 다양한 길을 터놓아 주지 못했구나. 무엇이든 이룰 것만 같던 그 벅참의 영광을 물려주지 못해 미안해. 그때는, 달리는 것만이 정답이라 생각했어.
물론, 모든 꿈을 이룰 수 없기에, 너의 다른 길 역시 응원한단다. 딱 정해진 길은 없기에 너무 절망하지도, 우울해 하지도 말렴. 너의 모습을 느끼면서 엄마도 새로운 길을 가볼까 해. 달리기만 했던 엄마의 삶에서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는 길. 이번 설에는 아마 집에 나도, 너도 없겠구나. 지금까지는 없던, 새로운 설이네. 아들, 힘들 때면 언제든 찾아오렴. 엄마가 멈춰서 기다리고 있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