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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 Mar 03. 2024

여자 둘의 자기만의 방

엄마와 나에게 방이 생겼다.

벌어보지도 못한 금액이 적힌 계약서를 앞에 두곤 두 손이 덜덜 떨렸다. 아무도 등 떠밀지 않았지만 우격다짐으로 서울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며 집을 찾던 패기는 어디 간 건가.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이미 인터넷에서 몇 번이고 읽은 표준 계약서를 꼼꼼하게 살펴보곤 이름 석자를 썼다. 이상했다.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부동산에서 나오는 길엔 어쩐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서울 끝에서 서울 끝으로. 3개월의 대장정이 지나서야 나의 ‘자기만의 방’을 찾았다. 그땐 몰랐다. 이곳으로 향하는 길엔 수많은 고난이 남아있다는 것을.




서울을 반으로 뚝 가르면 부모의 집과 정 반대에 있는 곳. 지하철 역에서 가깝고, 공원이 멀지 않고, 도서관이 주변에 있는 동네를 원했다. 3개월을 발품 팔아 세로로 기다랗게 뻗어 있는 집을 만났다. 커다란 창으로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점 역시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면 괜찮다' 싶었을 땐 다른 사람이 이 집을 계약해버리지 않을까 발을 동동거렸다. 계약을 결정하기 전 퇴근하고 동네를 산책하면서 마음이 더 바빠졌다. 부동산에서는 독촉 전화가 쏟아졌고, 혹여나 누군가 내가 맘에 드는 집을 먼저 계약하지 않을까 조급해졌다. 고양된 목소리로 쏟아내는 나의 전화에 아빠가 잠시 숨을 멈추곤 말했다.


"... 천천히 결정해도 괜찮아. 그 집이 인연이 닿지 않으면, 다른 집을 찾으면 돼. 네가 원하는 집을 반드시 찾게 될 거야"


잔뜩 웅크리고 있던 어깨에 힘이 툭 빠졌다.


타인의 다그침 때문에 섣부르게 결정할 필요는 없었다. 시간을 지켜볼 용기만 있다면, 무엇이든 자기 자리가 있을 거라는 단순한 진실을 이때 배웠다. 순식간에 마음이 뒤바뀌었던 이 날의 마음은 새로운 결정 앞에 설 때마다 꾸준히 나를 찾는다.





버젓하게 내 것이라 칭해진 서울의 방을 두고 또 다른 서울의 방으로 나가는 그 시점부터 엄마는 "앞으론 네 알아서 살아라" 차갑게 돌아섰다. 30대 서울 토박이의 서울 독립은 자칫 잘못 배 부른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니깐.


가시방석 같은 부모의 집에서 나는 나의 집으로 향하는 짐을 홀로 꾸역꾸역 쌌다. 엄마는 서른 넘은 딸의 비경제적 독립을 극도로 혐오하다가, 온당한 거리가 생긴 것을 기뻐하다가 비로소 완전하게 받아들였다. 독립한 지 4년 차. 내가 쓰던 큰 방은 동생의 것이 됐고, 동생의 작은 방은 엄마의 서재가 되었다. 엄마는 어디선가 조그마한 책상을 구해 방에 들였다. 조명과 서랍장도 가져다 뒀다. 난생처음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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