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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 Mar 17. 2024

살림 쇼핑 전쟁

온전한 내 살림을 만드는 일.

자취가 아닌 독립을 선언하면서 나는 단 하나의 물건도 부모 집에서 가지고 오지 않기로 했다. 이 단호한 결심을 하게된 이유는 “독립하게? 엄마, 아빠한테 진짜 독립하려면 10년 넘게 걸려”라는 직장 선배의 말 때문이었다. 취향에 안 맞는 꽃무늬 이불이나 유리 식기 등을 있는 대로 가져오고 나면, 그 물건이 망가지고 다시 새로 살 때가 되어야 내 취향의 살림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너무 맞는 말이라 아찔했다. 아, 상상 속 집을 이뤄내기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릴 거 같았다.


컵 하나, 수저 하나도 내 손으로 직접 고르겠다고 생각하며 짐을 꾸렸다. 몇 년 전 월급을 모아 샀던 가구 콘솔 가져올 생각이었다. 부모가 건네는 살림을 수차례 거절했음에도 지금 나의 집에는 동생이 쓰던 전자레인지와 스테인리스 냄비 하나, 주방 칼 하나와 작은 수납함이 왔다. 그럼에도 이사 당일, 짐 정리가 끝난 후에도 이상하리만큼 집이 텅 비어 있었다. 이삿날에 맞춰 주문한 매트리스를 박스에서 꺼내 바닥에 깐 게 다였다.


부동산 전쟁을 마치자마자 살림 쇼핑 참전권이 주어졌다. 가구 편집숍과 오늘의 집을 오가면서 잘 차려진 집들을 섭렵했다. 정돈된 집이란 생각보다 아주 작은 부분들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두루마리 휴지를 널어놓는 것만으로도 핀터레스트 속 집의 예쁨이 단번에 사라졌다. 휴지 케이스부터 칫솔 걸이까지 사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감각적인 카페와 좋아하는 상업 공간을 만든 이들을 향해 돌연한 존경심을 갖게 됐다. 작은 소품들까지 폭풍 검색을 거듭하면서야 타인이 꾸린 공간 속 아주 작은 배려와 디테일을 발견하며 감동하는 인간으로 거듭난 거다.


나의 집에는 기다란 거실이 있는데, 창문을 바라보는 자리에 테이블을 두고 싶었다. 글 쓰는 일을 해오면서 오랜 시간 꿈꿔왔던 단 하나의 가구였다. 가로 160cm 테이블은 혼자 쓰기엔 커도 너무 컸다. 그럼에도 흰색 상판에 크롬 레그는 작은 집에서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아 공간이 답답해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내가 무엇이든 넓게 펼쳐 놓고 상상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해외에서 두 달이 꼬빡 걸려 배송되는 테이블이 오기 전 나의 집엔 제대로 된 밥상 하나 없었다. 배송이 오는 동안 콘솔 위에 밥을 간단히 차려 먹었다. 혹자는 “쿠팡에서 싼 간이 테이블 사고 나중에 버려라”라고 조언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음에 쏙 들지 않는 물건을 값싸다는 이유로 들이고, 아직 쓸모가 남아 있는데 버리거나, 그것들에 둘러싸여 살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렇게 바다를 건너 땅을 건너 빈 집에 도착한 테이블을 혼자 꼬빡 앉아 조립하면서 느꼈던 기쁨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여전히 나는 '잘 고른 생활용품이 명품 하나보다 낫다'는 말을 믿는다. 당장의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하나씩 들인 크고 작은 물건이 차곡차곡 모여 내 일상이 될 테니까. 고심해 고른 작은 도구를 잘 관리하며 함께 나이 들고 싶다는 꿈은 나의 첫 독립과 함께 현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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