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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 Mar 31. 2024

애서가의 책장 없는 집

책장 독립 시키기.

"제발 책 좀 그만 읽고 공부해" 어렸을 때 많이 들었던 얘기다. TV 보는 시간이 각박하게 정해져 있던 엄격한 집안의 장녀인 나는 방에 콕 박혀 책으로 빠져들었다. 저녁 시간쯤 펼친 세계문학전집을 읽기 시작하다가 뒷 이야기가 궁금해 아침이 될 때까지 잠 못 이루던 강철 체력 어린이였다. 친구와 사이가 안 좋았을 때도, 스스로가 싫었을 때도 꼬빡 앉아 내리읽었다. 미취학 아동 때도 마찬가지다. 무서운 마음이 들면 책을 거꾸로 들고 큰 소리로 쫑알거렸다. 되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독서와 멀어졌다. 문장 구조나 글의 형식을 익히느라 되려 내용에 집중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읽지 않는 삶이 영원할 거라 비관했지만 돌이켜보니 찰나였다. 당연한 관성처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멈춰 책으로 향했다. 도돌이표처럼. 독서는 나의 부분이 됐다.


낡고 부서진 책장 앞에 서면 여전히 심장이 콩닥거린다. 이미 몇 번을 읽었음에 오래도록 펼쳐지지 못한 채 꽂힌 책들. 그럼에도 이들을 내다 버릴 수 없었다. 아무 책이나 꺼내 책장을 스스륵 넘기는 순간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이를 차근히 읽어 내려가던 어린 내가 빛바랜 종이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오래도록 책 표지만 바라봐도 마음이 일렁거렸다. 작은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기회. 그놈의 가능성 때문에 나는 수많은 종이와 더불어 살아왔다. 먼지 알레르기에 시달리면서.


이토록 사랑해 온 책을 전부 버려야겠다고 결정한 건 순식간이었다. 서른이 넘어 나만의 터전을 꾸리면서, 체크 리스크에 필요한 물건을 적었다. 이 거대한 책들을 영원히 짊어지고 살 순 없었다.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아마도 당분간 혹은 꽤 오랜 시간 서울에 집을 사긴 어려울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영영 살 수 없을 수도 있다. 자의로 또 타의로 이사할 때마다 종이 무더기와 함께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현실을 깊숙이 받아들였다.


무작정 책 읽는 방식을 바꿔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전자책 디바이스를 샀다. 리디북스와 밀리의 서재를 가입하고 꼭 읽고 싶은 책은 전자책으로 소장했다. 구독 서비스를 통해 평소의 나라면 읽지 않을 책들까지 읽으며 새로운 방식의 독서가 즐거웠다. 그리고 다시 도서관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살뜰하게 골라 빌린 책을 반납이라는 마감 기한 안에 가열차게 읽어 내려갔다. 전과 똑같지 않아도 괜찮다. 작은 집에 걸맞은 새로운 독서 라이프스타일이 필요했다. 언젠가 아름다운 서재를 갖는 꿈을 꾸는 나의 집에는 그 흔한 책꽂이조차 없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빌린 책, 선물 받은 책, 이따금 산 책들과 작은 집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쌓아둔 채로. 그저 나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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