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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 Feb 25. 2024

어디에서 살아볼까 알아맞혀 보세요

서울은 넓고 내가 살 방은 없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 혼자 살 집을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큰 상상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친구들에게 묻는 거였다. '서울에서 혼자 살기 좋은 동네 어디야?' 메모장에 빠르게 기록한 후 순서를 정했다. 마치 윷놀이의 말처럼 발걸음을 떼는 게 중요했다. 정확히 어느 쪽을 향할지는 크게 상관없었다. 결심했다면, 일단 움직여보겠다는 마음 하나뿐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망설인다면 영원히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강남에 사무실이 있었기 때문에 출근 시간을 한 시간 정도로 생각하고 동서남북으로 뻗었다. 예산이 맞고,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곳을 위주로 찾았다. 강서구, 관악구, 강동구 등 서울 이곳저곳이 체크리스트에 올랐다. 네이버 부동산, 직방 같은 곳에 매물이 있는지 확인했고, 약간은 안도했다. 시장을 대충 살펴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집을 구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물론 뻔한 드라마처럼 부푼 꿈과 현실은 달랐다. 챙겨야 할 매물 조건을 찾다 보니,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수두룩했다. 불가능한 대출 상품 역시 많았다. 보증보험 가입과 세대주 등록이 가능한 매물의 컨디션은 처참했다. 많이 양보해서 안전함을 포기하면 사진에서 봤던 집과 비슷하게 생긴 집이 있었으나 반드시 산 꼭대기나 어둑어둑한 길목에 위치했다. 30년 넘게 서울에만 살았지만, 내 한 몸 안전하게 뉘일 곳은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낮에는 발바닥이 아프도록 서울 곳곳을 누볐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매물을 검색했다. 내가 머물던 부모의 집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10대 때부터 한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오래된 아파트지만 오가는 길목에 CCTV도 있고, 지하철역도 가까웠다. 언젠가부터 의식하지 못했던 일상의 안전망은 모두 부모가 쟁취해 생활로 끌어온 대가였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어디서 어떤 집을 봤었는지 헷갈릴 정도가 되자 절망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약간은 애매한 위치에 있지만, '이 정도면 됐다' 싶은 집을 계약하고자 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집 앞놀이터는 밤에 우범지대가 될 수도 있다', '사다리꼴로 기울어진 방은 안 된다'는 식이였다. 아빠가 이 정도면 괜찮겠다 하는 몇 안 되는 집은 내가 견딜 수 없을 거 같았다. 들어서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아주아주 작은 방이었다.


자주 울컥했다. 이사할 사람은 나고, 결국 그 공간 안에서 생활을 하는 것도 나였으니까. 부모가 '안 돼'라고 말하면 맨땅의 헤딩하듯 다시 낯선 서울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잦은 말다툼도 있었고, '그냥 내 집에서 살아라'는 말이 오갔지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떤 묵직한 확신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강서구부터 강동구까지 차곡차곡 서울 한 바퀴를 돌면서 우연히 아무 부동산에 벌컥 들어갔고, 그때  남아 있던 매물이 나의 첫 번째 집이 되었다.





긴 시간 집을 구하면서 같은자리를 맴돌고 있는 나를 보며 친구들이 묻기도 했다. "왜 부모님과 집 컨디션을 상의해? 네가 결정해" 맞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니깐. 그렇지만 자식의 홀로서기를 지켜보는 부모의 눈동자는 자주 흔들렸다. 아무리 내가 만족스러워도 그들이 끔찍한 상상을 할만한 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나의 새 집은 일단 버젓한 입구가 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서울엔 초록색 유리문을 가진 집도 많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사실, 이 방을 처음 봤을 때는 투박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묵직한 컬러의 커다란 킹사이즈 베드가 있었고, 운동 기구들이 아무렇게나 널려있었다. 그렇지만 아주 커다란 창이 있었다. 덕분에 아늑했다. 아마 서울엔 똑같은 금액으로 더 좋은 집이 많겠지만 분명 나의 부모와 나의 바람이 교차되는 집이었다.


그렇게 서울 사는 이의 첫 서울 독립은 상상에서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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