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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 May 19. 2024

1인분의 삶

지나치지 않고 현재를 사는 법.

낡은 밥솥을 버리고 작은 밥솥을 하나 사기로 했다. 1인 가정이 쓰는 가전의 대표 브랜드와 4인 가족이 쓰는 것과 브랜드는 조금 다르다. 혼자 사는 이들에겐 저렴하고, 멀쩡한 디자인을 강점으로 앞세운 가전이 인기가 많다. 4인 가정이 쓰는 가전은 기능 자체에 집중한 브랜드가 인기가 많다. 디자인은 덤이다. 그런데 맛있는 밥을 지어준다는 브랜드의 밥솥은 4-6인용보다 1-2인용이 비쌌다. 기능에 충실힌 값비싼 가전은 1인 가정에게는 수요가 없기 때문이다. 몇 만 원 아끼고자 커다란 4인용 밥솥을 집에 들여야 할까.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기어코 돈을 조금 더 보태 작은 걸로 샀다. 기능에 충실한 새 하얀 밥솥을. 더이상 1인분의 삶이 인생을 반드시 스쳐 지나갈 과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왕이면 나에게 오래오래 맛있는 밥을 지어줄 밥솥을 갖고 싶다. 조금 비싸더라도, 내게 알맞는 물건이 갖고 싶었다. 밥솥이 집으로 도착한 날엔 이상하리만큼 설렜다. 첫 번째 밥을 지을 때도 그랬다. 이 작은 가전은 내가 1인분의 삶을 허투루 대하지 않고 있다는 진심이 담겼댜. 까끌했던 현미밥이 놀랍도록 촉촉해졌다. 아쉽지만 혼자 사는 삶은 가성비와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나의 쉼은 오롯이 쉼으로 남아 있다. 일 끝나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아무런 사회생활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침묵하면 소리가 들리지 않고, 커튼을 닫으면 어둠이 찾아온다. 온당한 쉼 속에는 타인을 향한 배려와 고마움은 없다. 스스로 지불한 몫으로 온전히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저번 주엔 부산에 혼자 다녀왔다. 혼자 영화 보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여행 가는 일에 익숙한 나는 더 이상 혼자가 불편하지 않다. 나이를 먹을수록 친구들은 점점 바빠지고, 각자의 책임과 사정이 생긴다.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한다는 전제는 쉬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지만, 이는 더이상 슬픈 일이 아니므로. 이젠 하고 싶은 모든 일을 그냥 혼자 한다. 언제고 치열한 대화를 좋아하지만 이따금 깊은 침묵이 필요하다. 침묵에는 분명 평화와 고요가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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