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오래된 흔적들을 정리하고 있다. 본가에서 나와 산지 일정 기간이 지나자 엄마는 남아 있는 나의 물건, 책, 자료, 편지 등을 정리해 주기를 긴 시간 바라왔다. 연말에 오랜만에 본가에 다녀왔는데 신발장 앞에 내 남은 물건들이 꺼내져 있었다. 어쩐지 끝까지 미루고 싶던 일이었는데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먼지가 쌓인 물건들을 살펴봤다. 다이어리, 사진. 친구들의 롤링페이퍼와 러브레터. 절절한 마음과 사랑이 그 속에 다 있었다. 낯선 이름들이.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는 이들의 휘발된 마음들이.
다리가 저릴 때까지 꼬빡 앉아 물건을 정리하다가 엄마가 써준 편지를 발견했다. 나는 일부로 큰 소리로 읽었다. 대부분 물 많이 마시고, 잘 챙겨 먹고, 열심히 공부하고,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사랑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모가 나에게 써준 편지에도 사랑한다는 말이 있었다. 생경했다. 아마 열다섯 때쯤부터인가. 거절당하고 상처받는 게 두려워졌다. 말의 무게의 짓눌려 뜨거운 마음을 소리 내서 말하는 걸 피해왔다. 좋아하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어려웠다. 이상했다. 어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서운하다고 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거의 없다. 입 밖으로 쏟아지지 않는 감정이 목에 턱 걸릴 때마다 꿀떡 삼키곤 '원래 표현을 안 하는 가정에 자라나서 낯설다'는 궁색한 변명을 중얼거렸다. 그런데 오래된 편지 꾸러미는 자꾸 다른 이야기를 했다. 몰랐다. 돌이켜 보니 기억은 왜곡되었고 나는 수년 동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읽어주는 편지를 듣더니 "어렸을 때부터 너에게 사랑을 참 많이 줬는데"라고 말했고 나는 다시 한번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때는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나한테 건네진 게 사랑인지 몰랐어"
설 연휴를 맞아 다시 본가에 갔을 때 그날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책과 물건들이 또다시 꺼내져 있었다. 그중 하나는 족히 5천 장은 되어 보이는 영화 포스터였다. 마음을 다해 물건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 겁이 나서 ‘그냥 다 정리해달라’고 부탁하고 갔던 것들이다. 엄마는 차마 그냥 버리진 못하고 내가 다시 집에 올 때까지 방 안에 산처럼 쌓아 놨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오랜 시간 모아 온 포스터를 한 장 한 장 들춰 보며 영화를 뜨겁게 짝사랑하던 시절을 목격했다. 또 성적표, 크고 작게 이뤄온 성과들,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 내가 참여한 작품의 브로셔까지 하나씩 살펴보고 정리했다. 이상하다. 기꺼한 마음으로 치열했던 시간도 어느 순간 희미해진다. 빛바랜 포스터처럼. 어쩌면 지금 쓰고 있는 이 문장들조차 기억에서조차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지나친 인연들처럼. 앞으로 내가 마주할 열정을 쏟을 무언가와 고백하게 될 마음들에 대해 상상한다. 하릴없는 마음과 하릴없는 무엇들. 두서없이 엉켜 있던 추억의 여과물이 박스 하나로 단출하게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