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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음 Oct 24. 2021

9. 책의 무게

 어느 여름날, 사장은 출근을 하자마자 나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그는 내게 평소엔 하지도 않던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생활은 어떠한지, 부모님은 잘 계시는지, 날이 참 더운데 요즘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지 같은 시시콜콜한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사장 역시 자신의 자서전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절반 정도는 해결한 것 같다네. 다행이지." 나는 사장이 무언가 할 말을 두고 질질 끌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용건은 따로 있었다. 사장은 내가 자기 대신에 서가의 책을 정리해 주기를 원했다. 열한 시 경 중고 서적 업자가 오기로 되어 있는데, 자신의 아내 혼자서 그 일을 처리하기에는 버거울 터이니 도와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거기엔 조건이 있었다. 도움의 대가로 사장은 내게 원하는 책은 무엇이든 그냥 가져가도 좋으며, 판매 대금 십 분의 일을 나의 몫으로 챙기라고 말했다. 내겐 딱히 바쁜 업무가 없었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사장의 집은 지하철역과 가까운 아파트 대단지에 위치해 있었다. 어찌나 더운지 역을 빠져나와 걷던 짧은 시간 동안에도 이마에서 땀이 연신 흘러내렸다. 높다란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하니 자그마한 슈퍼마켓이 하나 있었는데, 입구 진열대에 깔린 탐스러운 수박과 복숭아가 나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사장의 집이라면 먹을 것들이 차고도 넘칠 것 같았지만 방문객으로서 예의를 갖추기 위해 나는 장호원 복숭아 한 박스를 선물로 샀다. 단지 내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매미들이 목청껏 울어대고 있었다. 남의 집에 방문하는 것이 어찌나 오랜만인지 그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질 않았다.

 도착하여 벨을 누르니 금세 문이 열렸다. 사모는 내가 온다는 이야기를 미리 전해 들었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업자는 오기까진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었다. 사모는 사장의 서재를 안내해 준 뒤, 이미 들은 바가 있으니 편하게 둘러보라며 자리를 비워주었다. 사장의 아내 답게 말투나 행동에서 비슷한 점이 많이 보였다. 손님이 온다고 하여 갖춘 것이겠지만 주름 하나 없이 단정한 감색 모슬린 천 긴팔 원피스를 입고 있던 사모 역시 기품이 있었다. 경상도 말씨가 조금 남아있는 여자였는데, 억양에서만 얼핏 티가 났을 뿐 단어들을 굉장히 정확하게 발음했다. 나는 그녀 역시 사장이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을 자서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잠시 후 그녀는 문을 서재 문을 두 번 두드렸다.

 "복숭아가 아주 달고 맛있네요. 고마워요." 내가 사 가지고 간 과일을 깎아 좀 먹어보라며 가져다 준 것이었다.

 사장의 서가는 언젠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제법 달랐다. 창문이 없는 방이었는데, 문이 달려있는 벽을 제외한 나머지 삼면이 책장으로 빈틈없이 꽉 차 있었다. 나로서는 감이 오지 않았지만 그 정도면 만 권은 족히 되어 보였다. 나는 어쩌면 사장의 괴로움이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으면 사람이 미쳐버리고 마는 법이란다." 어머니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특히 아버지가 곁에 있을 때면 더욱 힘을 주어 말하곤 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기행은 책 때문에 생긴 광기라는 말이었다. 어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인생을 통틀어 아마 한 권의 책만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것은 바로 성경이었다.

 한편으로 나는 사장의 고독이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그와 같이 책을 통해 배운 것이 많다 못해 지나칠 정도가 되고 나면, 한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의 총량을 초과할 지도 모르는 법이다. 언젠가, 사장이 내게 대학생활에 대해 물어봤을 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까닭은 단순했다. 아는 게 많아지면 그러할 수록 나는 확신이라는 것을 그만큼 더 잃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그때 가장 강한 확신은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믿게 되었다.

 사장의 서가는 정말로 다양한 분야의 책들로 가득했다. 그 이름들을 헤아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그것들 중 나는 자연을 담은 도감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식물도감에서 내가 죽인 나무들을 발견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곧 있으면 중고서적 업자가 올 것임을 알아차리고 나는 조금 서둘렀다. 그 많은 책들을 보고 있으려니 차라리 내가 다 가져가고 싶은 욕구가 슬쩍 피어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좁은 나의 방에 모조리 들인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방의 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책상은 그의 성격답게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마호가니로 짠 붉은 책상 위에는 그의 명함과 만년필 한 자루, 공책 한 권만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아마도 사장의 자서전 원고인 것 같았다. 순간, 나는 그것을 몰래 들여다 보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그가 거기에 무엇을 기록해 두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떤 방식으로 쓰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다 혹시라도 사모가 방문을 열고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기에 나는 망설였다. 어찌되었든, 그게 좋은 행동일 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 공책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아니나 다를까 첫 번째 장에 자서전이라는 단어가 크게 쓰여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음 장부터는 단 한 단어도 쓰여있지 않았다. 다소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오전에 사장이 이 일을 부탁할 때에만 해도 그는 분명 절반 정도는 썼노라고 답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와 같이 중요하고 은밀한 작업을 하는 공책은 따로 두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자 허탈해졌다. 그러던 사이 중고 서적 업자가 도착했다. 사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키가 크고 다부진 체격의 남자였는데, 아직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어린 소년을 조수로 데리고 왔다.

 "듣기로는 팔천 권이 넘는다고 하던데, 그대로 다 가지고 가면 되겠습니까?" 그는 숨을 고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연신 훔쳐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삼복더위였고, 나는 벌써부터 돌아갈 길이 우려되고 있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입김과 체온의 틈바구니를 견뎌야만 했던 것이다. 어느새 사모는 내 곁으로 와 있었는데, 가져갈 책을 다 골랐는지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업자들에게 작업을 시작해도 좋다고, 나머지는 다 내게 일임하겠다며 말하고 거실로 나갔다. 그들은 능숙하게 일을 시작했다. 그때 나는 아직 가격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이 떠올라 커다란 사내에게 물었다. 그는 굽혔던 허리를 쭉 펴 몸을 일으키더니 눈을 끔뻑거리며 말했다.

 "킬로당 삼천 원이고, 인건비는 따로 안 받습니다." 의아한 기분이 들어 내가, 책의 종류 가리지 않고 전부 무게로 따지는 것이냐고 묻자 그는 새삼스럽게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들은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꺼내놓고 보니 책은 정말로 많았다. 기다리는 동안 대충 헤아려 보아도 만 권은 가까이 될 것 같았다. 그러자 나는 사장이 왜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책들을 모으는 데에 든 돈과 수고가 엄청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거기엔 사장의 추억도 함께 담겨있을 것이었다. 그것들을 킬로당 삼천 원에 판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하지만 모든 건 결국 다 이유가 있어 하는 법이니 그 이상 궁금해할 필요는 없었다. 단지 나는 나의 몫으로 남겨 놓은 약간의 책과 수고비를 챙겨 가기만 하면 충분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토종닭 한 마리와 약재들을 조금 살 만한 돈이 나온다면 좋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며칠 전이었던 초복 때 어머니 몸보신을 제대로 시켜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들의 작업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식물도감에서 란타나에 대한 내용을 읽던 중이었다. 어머니가 키우던 란타나는 흰 꽃을 피우는 나무였는데, 알고 보니 다른 색의 꽃을 가진 란타나도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특히 노란색 꽃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데,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한 번 키워보고 싶었다.

 "엄청난 양이네요. 이 일을 하고 처음입니다. 이 정도로 많은 책을 파시는 분은 말이죠. 책을 파는 사람들은 보통 비슷한 책들을 가지고 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읽지 않아도 저 책이 대충 어떤 건지는 아는 편인데, 여긴 도무지 모르는 책들 투성이군요." 그는 가지고 온 수첩에 적어 놓은 책 다발의 무게들을 더하고 있었다. 그의 조수는 뒤에 서서 마지막 수레에 담은 책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줄을 꽉 매었다.

 그는 사장의 뜻에 따라 판매금을 전부 현금으로 지불하겠다며 가지고 온 커다란 가방에서 돈을 꺼냈다. 오만 원 권 열 여덟 다발을 하나하나 책상에 올려둔 뒤 나머지 분이라며 오십만 원을 따로 내게 건네어 주었다. 전부 합쳐 1850만원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반올림 해서 쳐 드린 겁니다. 확인해 보시죠." 나는 그것들을 일일이 세어 보기 시작했다. 한 묶음에 백만 원씩 열 여덟 개가 정확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몹시 어리둥절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사장이 말한 대로 십 분의 일을 챙겨간다는 것은 부당한 행동처럼 보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내게 베푸는 이 호의가 어느 면으로는 적선처럼 느껴져 아리송했다. 어쨌든 수고의 대가라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부당했다.

 "확인하신 게 맞다면 여기에 서명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업자는 이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서명란에 사장의 이름을 적었다. 그때 그가 물었다.

 "저 책들은 안 파시는 게 맞죠?" 내가 따로 꺼내어 둔 열 권 남짓한 도감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팔겠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신속하게 무게를 재었다.

 "오만 사천 원입니다." 나는 그에게 오만 원만 받겠다고 말했다.

 머잖아 그들은 떠났다. 삼면을 가득 채우던 책장의 책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사장의 방은 초라해 보였다. 마치 소중한 것을 억지로 빼앗기고 던져진 것 같은 돈다발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손에 들려있던 오만 원 한 장을 가만히 바라보다 주머니에 넣고 문을 나섰다. 집으로 가는 길에 살 복날 음식 재료에 더 이상의 돈은 필요하지 않았다. 인삼도 조금 사 가지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장 방의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을 때 사모가 웃으며 차를 한 잔 권했다. 널따란 거실에 놓인 소파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때 베란다 밖으로 보이던 노을이 참 아름다웠다. 그곳에선 한강이, 그리고 빌딩숲 너머 하늘이 시원하게 보였다. 거기에 그들의 여유가, 그리고 고독이 있었다.

 사모가 가져다 준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시니 금세 시장기가 돌았다. 집에 전화를 한 통 해, 오늘 저녁은 삼계탕이니 저녁상을 차리지 말고 기다려 달라 말을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나는 마늘을 듬뿍 넣고 오랫동안 끓여낸 삼계탕을 정말 좋아한다. 그때 사모가, 가져갈 책을 담을 가방을 하나 빌려줘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사모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금세 입을 막고 킥킥거렸다.

 "정말로 듣던 그대로네요." 사모는 내게 웃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사장이 내 이야기를 한 적이 몇 번 있었다고 말했다. 믿을 수 있는 직원 중 하나라고. 전날 밤에도 이 작업을 도울 사람으로 나를 지목하며 덧붙인 말이 있었는데 그게 그녀를 웃게 만들었던 것이다.

 "책의 무게를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라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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