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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Oct 21. 2020

회사 다닐 때 가장 많이 되뇌었던 말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

가수 패닉 <달팽이>(1995) 첫 소절 중에서



♬ Yeah you can keep me warm on a cold night~♪ <warm on a cold night – HONNE>

이 노래의 후렴구이자 내 알람 소리(밤에 들어보면 딱 좋을 노래)에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가 이내 곧 다시 잠이 든다. 5분 후 다시 울리는 알람 소리에 휴대폰 시계를 보니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이다. 어제 팀 회식 때 마신 술 영향인지 아직도 머리가 ‘띵~’하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씻는다. 하지만, 사실 상 하루 중 나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시간인 만큼 정신을 다시 차린다. 준비가 되는 대로 허겁지겁 나가면서 아내와 대충 인사를 하고 지하철에 오른다.


'아… 사람이 무지 많다.'

만원 지하철, 아니 천만원 지하철쯤 되는 듯하다. 하지만, 타야 한다. 눈을 감고 자듯이 사람들 틈에 껴서 가다 보면 환승역에 도착하고 다음 구간으로 갈아타기 위해 사람들과 다시금 섞여 걷는다. ‘오늘은 앉아서 가려나’ 하는 기대 반, 불안 반의 마음으로 지하철을 갈아탄다.


오늘은 다행히도 앉았다. 앉자마자 오늘 있을 보고를 위해 어제 작성한 보고서를 다시 한번 꺼내서 본다. 보고서 내 글자크기, 행과 열 간격은 잘 맞췄는지, 오타는 없는지, 내용상 중언부언하는 것은 없는지 등을 본다. 일단 팀장선에서는 이런 기초적인 것에 대한 오류가 없는지를 먼저 본다. 그다음 내용으로 들어간다. 사실 보고서 작성자 입장에서는 너무 지엽적인 것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것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는 많았으니까.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보고 받는 입장에서는 내용을 보기도 전에 보고서 형식이 틀어져 있고, 들쭉날쭉하다면 사실 읽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살짝 해본다.


보고서 내용도 다시 한번 파악하고 이 생각 저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 역에 도착하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우르르’ 내린다. 내리는 순간부터 누군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쏜살같이 뛰어가고, 누군가는 에스컬레이터를 성큼성큼 걸어 올라간다.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주는지 아침부터 힘이 넘쳐 보인다. ‘오늘은 나만 이렇게 피곤한 건가?’ 하는 생각도 하면서 뭔가 활기 있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이 꽤나 부러웠다. 멋지게 차려 입고 이 아침에 출근하는 남•녀 사람들을 보면 그 부지런함에 존경심마저 든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사무실에서 먹을 빵과 바나나 우유를 하나 샀다. 아침식사는 늘 제대로 먹기가 어렵다.

이런 광경은 조식 뷔페에서나...


바삐 도착한 회사는 아침부터 무슨 일이 있는지 전화벨도 여기저기서 울리고 왠지 부산스럽다.


'아… 불안하다.'

 

게다가 팀장은 내 아침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어제 준비한 보고서부터 달라고 한다. 숨도 돌리기 전에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내 자리로 전화가 온다. 다이렉트로 15분가량 타 부서 직원과  전화통화를 마치자 벌써 진이 빠진다. 이제 편의점에서 구입한 빵과 우유를 먹으려던 찰나, 팀장이 팀원들 앞에서 전달사항이 있다고 말한다.


“어제 팀 회식으로 다들 고생 많았어. 근데 오늘은 예기치 않게 부장님께서 우리 팀과 저녁식사를 하자고 하시네? 얼마나 좋으냐~. 약속 있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웬만하면 다들 꼭 참석하도록. 특히! 승진 발표 얼마 안 남은 사람들은 알아서 자알~ 눈치껏 하고”  

 

아…씌… 집에 가고 싶다.





그렇다. 저 말은 예기치 않은 저녁 회식, 참석은 자유라고 말은 하나, 승진에 대한 고과 권한을 가진 자의 명(命)인데 안 오고 배길 소냐 뭐 이런 뉘앙스인 것이다. 승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고과 권한, 아니 이쯤 되면 ‘고과 권력’이라고 하자. 그 알량한 권력도 권력이라고 함부로 휘두르는 경우가 회사 내에서 부지기수(不知其數)다.


현재 우리나라 회사 조직 상당수의 평가, 보상 시스템은 여전히 주먹구구식이라고 생각한다. 평가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직원이 얼마나 오래 의자에 앉아있고 야근을 많이 했는지, 주말 출근은 하는지, 자신의 휴가를 얼마나 많이 반납하고 출근을 했는지 와 같은 비 정상적 행위가 고과 점수를 조금이라도 더 받는 방법이 되고(2017년 말부터 ‘워라밸(Work & Life)’ 문화 확산으로 강제로 주말 출근 및 야근 금지, 강제로 휴가 보내기 등을 통해 조금씩 변화해 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눈치를 주고 있었다.), 더 나아가 상사와 얼마나 늦게까지 술을 자주 마셔주었는지가 인사 고과를 결정한다. 고과를 잘 받아 승진을 하려면 그 속에서 참고 견디는 것이 맞고, 아니면 틀린 것이 되었다.


휘두르는 고과 권력에 개인의 정신과 온몸에 멍이 든다. 그런데 이러한 무형의 폭력이 난무해도 대다수는 그냥 “버텨야 한다.”라거나, “적응해야 한다.”는 말로 무마해 버리고 순응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이 상황들을 버티면 ‘정상’, 못 버티거나 “이러면 안 되지 않나?”라고 반문하면 오히려 ‘비정상’으로 몰리게 된다. 사실 정상인을 비정상으로 몰아가는 것에 있어서 상사 본인보다 그 옆에 있는 측근들이 더 유별나게 구는 경우가 꽤 있다. 정말이지 고과를 가지고 휘두르는 권력 행위는 ‘직급이 깡패다.’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자, 그렇다면 저녁을 상사와 함께 먹는 게 문제겠냐 싶겠지만, 실상은 밥을 먹는다 라기보다 그 자리를 채우면서 거의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다. 바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조선시대 세종 때 지어진 책의 제목으로써 ‘용(임금)이 날아올라 하늘을 다스린다’는 것을 뜻하며, 조선 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높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드라마로도 알려진 ‘육룡이 나르샤’가 이 책의 1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런데 이 ‘용비어천가’를 조선시대가 아닌 지금 이 시대에 부장을 위해 노래하는 것이다. 내가 있던 곳이 유별났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길 바란다. 정말이지 술이 들어가면 어찌나 그렇게 다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구구절절 감탄을 불러일으키는지…. 모두가 승진할 기세다. 권력 앞에 자신의 미래를 부탁한다며 읊조리는 그 모양새가 예사롭지가 않다.

그러고 나서 노래방을 가고. 노래방을 가면 박상철의 ‘무조건’을 반드시 선점해야 한다.

 

출처: gqkorea



“♬ 부장님(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특급 사으랑이야~~~~♪” 라며 누가 먼저랄것 없이 난리부르스를 춘다. 그렇게 1시간 이상을 노래하며 술을 마시고, 그러고 나서 부장을 집으로 보내면 다들,

“노인네 징하다 징해, 에효…. 이 짓거리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냐.”

라며, 분노+욕을 한다. 너나 할 것 없이. 이 패턴이 부장 회식 때마다 있던 것이다.


참고로 상사 중에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할 상사가 있다. 아, 물론 이런 상사를 좋아한다면 만나서 함께 일하고 싶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다음 유형의 상사를 좋아하는 직원들을 여태껏 본 적이 없다.

대표적으로,

1. 기러기 아빠 : 늘 저녁 식사를 직원들과 함께 하고 싶어 한다.

2. 술고래 : 그 저녁 식사 때 꼭 술을 진탕 마시고 싶어 한다.

3. 호색가 : 만취에 그치지 않고 끝을 보고 난 뒤에야 외로이 집으로 가는 차량에 몸을 싣는다.

당시 그 부장은 기러기 아빠 & 술고래였다.




허무하지 않은가. 그렇게 ‘용비어천가’를 불러대고, ‘특급 사랑’을 외쳐서 자신을 어필했지만, 결국은 진심으로 ‘좋아서’가 아니라 이렇게 해야 ‘사니까’ 한 것이다. 앞으로도 누군가는 저런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해서라도 이 조직에서 살아남아서 승진해야지.” 하는 사람이 있겠지. 아니, 많겠지.



나는 부하직원 개인의 삶의 일부, 시간을 마음껏 유린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그 문화(악•폐습이 쌓이고 쌓여 문화화 됐다. 문제는 문화가 쉽게 바뀌기가 어렵다는 것이다.)가 싫었다. 솔직히 나도 이 조직에서 버티려 한 사람이다. 쉼 없는 주말 출근에, 평일은 야근에, 술 시중에, 뻣뻣한 몸을 움직이며 노래방에서 흥을 돋우는,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치며 과장으로 승진도 해봤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슬퍼졌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는 것인가 싶었다. 과장은 그렇다고 하고 다음번 승진을 위해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저렇게 해야 할 것이라는 기정사실이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회식 자리에 내 개인적 약속들을 깨 가며 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결국,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날도 스스로에 대해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집이 먼 건지, 아니면 노예 신분으로서 내 삶의 시간들을 내가 컨트롤할 수 없다는 자괴감 때문인지….


그런 생각의 날들이 그렇게 쌓여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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