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새벽에 들은 노래 3'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담장을 따라서 난 길 끝에 위치한 초등학교를 향해 아침이면 각 아파트 현관에서 쏟아져 나온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강의 하류로 향해 가는 물고기들처럼 다 같이 학교로 향하는 일상이 당연한 동네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엇. 경덕이다.'
곱슬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생머리 위로, 햇살이 그대로 머리에 내려앉고는 했다.
'쳇. 저런 머릿결은 나나 주시지.'
태양이 만든 선명한 원형 띠가 어른거리는 까맣고 동그란 머리통을 뒤에서 걸어가며 바라보다, 애꿎은 내 곱슬머리를 매만지던 손을 뻗었다.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또 셔츠 입었네?"
"어... 응. 근데 오늘은 진짜 덥다. 9월인데 왜 이렇게 덥냐."
어려서는 나보다 키가 작았던 경덕이는 유난히 마르고 흰 피부를 가진 남자아이였다. 2학년에 처음 같은 반이 되었는데 알고 보니 같은 아파트에서도 바로 옆 라인에 살고 있었다. 늘 나보다 조금은 빨리 학교를 가는지 내가 아파트 현관을 뛰어나가고 보면 늘 앞에 먼저 걸어가고 있었던 경덕이었고, 그런 그 애를 불러 세우는 나였다. 같은 또래 남자아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경쟁하듯 신형 축구화를 자랑하며 축구 유니폼을 입고 등교해서는 마치 원래 태어날 때부터 땀방울이 기본값으로 달려 나온 듯 고슴도치 머리를 하고 뛰어 다니는 동안에도, 경덕이는 늘 깨끗하게 잘 다려진 셔츠를 입고 다녔다. 뭘 특별히 잘하지도, 잘 못하지도, 예쁘지도, 그렇다고 못생긴 것도 아닌 중간의 내가 늘 옷에 뭘 조금은 묻히고 다니는 것이 기본값이라면, 레고인형처럼 깔끔한 헤어스타일에 흰색 셔츠를 입고 학교에 와서 흰색 셔츠인 채로 집으로 돌아가던 그 아이. 나와 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랬을까. 늘 조용히, 남자애들이 흔히 던지는 유치한 농담도 한번 던지지 않는 그 아이를 보며, 신기했다. 그런 경덕이와 난 교실 안에서는 특별히 나누는 이야기가 없었지만 아침의 조용히 부산스러운 등굣길이나 다들 뿔뿔이 흩어지고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우리만 남는 그런 순간이면 띄엄 띄엄이지만 드문드문 이어지는 이야기를 주고받고는 했고, 그런 이야기들은 가슴 한편에서 어딘가 나를 뿌듯하게 만드는 일상의 조각이 되고는 했다. 그래서, 하굣길에 저 앞에 경덕이가 보이면 조금 빨리 걷고, 뒤에 그 아이가 있으면 조금 천천히 걸었더랬다. 그렇게 늘 등하교 길에 마주치던 날들이 쌓여 가끔은 나란히는 아니지만 좁은 간격을 두고 걸으며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지점에서는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네며 일상을 익숙히 여기는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린 초등학교의 마지막 학기를 지나가고 있었다.
사건이라고는 없는 조용한 아파트 단지가 앰뷸런스로 시끄러워진 것은, 저녁을 다 먹고 엄마가 한창 설거지를 하고 난 뒤의 어느 즈음이었다. 구급차와 소방차 소리가 너무 가까이서 들려 깜짝 놀란 엄마가 베란다를 내다보시고는 집에 잠시 있으라시며 나갔다 오셨다.
"엄마, 뭐야? 뭐야?? 불났어?? 어디에??"
"아냐, 아냐, 아무것도. 잘못 신고가 들어갔대."
"엥? 진짜?"
"어. 별일 아냐. 얼른 씻자. 늦었네."
그렇게, 해프닝으로 지나간 소동의 다음날, 그 주의 우유 당번이었던 나는 3교시가 끝나고 1층의 급식실로 우유를 가지러 갔다. 반 아이들의 몫의 유유가 가득 담긴 플라스틱 바스켓을 함께 당번인 서아와 나누어 들고 낑낑거리며 5층 우리 교실로 향한 특별할 것 없던 날이었다.
"우유 신청한 사람, 여기 놔둘 테니 와서 가져가~!" 라며 아이들에게 공지를 하고, 다음 쉬는 시간에 바스켓을 반납하려는데 우유 한 개가 덩그러니 바스켓 안에 남아 있었다. 치워야 하는데, 안 가져간 사람 누구냐며 교탁 위에 둘 테니 알아서 가져가라 소리치는 내게 누군가 답했다.
"그거 이경덕 거야. 오늘 안 왔어~."
그제서야, 경덕이 자리가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루 결석인 줄 알았던 경덕이는 그 후로도 며칠을 등교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수군거리던 아이들도 비어있는 한 자리가 어딘가 모르게 익숙해질 즈음, 선생님은 경덕이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고 공지하셨다. 그게 그 아이의 이름을 들었던 마지막 날이었다.
그 날, 학교가 끝난 뒤 돌아간 집에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커피를 드시고 계셨다.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들어갔지만, 주방과 가까운 내 방에서는 아주머니들의 수다 소리가 고스란히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자살이었다며. 우울증이 심했다나 봐."
"애가 다 봤대. 애가 신고했대...."
"아이고...... 어찌 살아, 지 엄마가 그렇게 된걸 직접 봤으니."
"애 아빠도 너무 안되었지 뭐. 그렇게 자상했다는데. 우울증이 사람 잡는다니까."
우울증이 정확히 어떤 병인지는 모를 나이였지만, '자살'이라는 무거운 단어의 뜻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름이 드러난 대화도 아니었지만 막연하게 그날 밤의 앰뷸런스와 아무 일도 없었다며 둘러대던 엄마의 표정과의 교집합에 '자살'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도.
하지만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도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던 기억의 선명함도 시간이 지나며 점점 바래갔다. 그 사이 다리가 붕괴되고, 백화점이 무너졌다. 우리는 아빠의 이직으로 새 동네로 이사를 했다. 친했던 친구들과 모두 헤어져 새로 친구를 사귀며 겨우 적응한 중학교를 지나니 고등학생이라는 반갑지 않은 타이틀은 '성적' 외의 모든 것을 희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집-학교-학원-독서실을 오가며 건조하게 버석거리는 매일을 버티는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돌아온 집에 오랜만에 화장을 한 채 특별한 날에만 꺼내드는 핸드백을 손에 쥔 채 멍하니 식탁에 앉아 있던 엄마가 있었다.
"엄마 어디 다녀왔어?"
"어?.. 으응. 엄마 친구가 태릉역 근처에 식당을 개업했다고 해서, 진작 갔어야 했는데 오늘 다녀왔네."
"아~근데 왜 이러고 있어."
"아........ 민희야, 너 경덕이라고 기억나? 왜, 너랑 같은 반도 된 적 있을걸? 전에 같은 아파트 살았던..."
"아, 알지, 갑자기 전학 간 애."
"엄마가 오늘 걔네 아빠를 봤어."
"아.. 엄마가 경덕이 아빠가 누군지 알아?"
"어떻게 몰라. 경덕이 엄마가 자살해서 이사 갔잖아. 왜, 밤에 앰뷸런스 오고 동네가 난리였잖아. 근데, 그 아저씨가, 오늘 간 엄마 친구네 식당에서 어떤 아줌마랑 식사를 하고 계시더라?"
".... 재혼하셨나?"
".. 그런가 했는데. 엄마 친구 말이, 그 동네에서 유명한 오래된 잉꼬부부라는 거야. 벌써 10년 가까이를 두 손 꼭 잡고 장보러 다녀서, 그 시장통 사람들은 다들 알만한 커플이라는 거야."
10년이라. 내가 경덕이를 보지 못한 것이 이제 겨우 5년인데. 10년이라. 도무지 무슨 일인지 계산이 되지 않는 나의 표정도 살필 새가 없는 엄마는, 여전히 식탁에 앉은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이가, 그래서. 그래서 그랬네. 그거였어."
경덕이는 다림질의 뜨끈한 기운이 남아 있는 셔츠를 입어야 하는 때가 제일 싫다고 볼멘소리를 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기를 거르는 날이 없었던 이유를 경덕이의 아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