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일기(12)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섰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김광섭, '생의 감각' 중
--
이 시를 접한 건 고등학교 때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할 때고 입시에 지쳐있을 때인데 이 시 하나가 가끔씩 나를 살렸다. 지금도 '채송화 무더기'의 색감과 바람에 흔들리는 움직임을 떠올리면 어두웠던 장면 자체가 환해진다. '생의 감각'은 그렇게 참 중요한 나의 키워드가 됐다.
나를 살리는 숨. 요가와 명상을 하다 보면 들숨, 날숨, 멈춤. 내 숨에 집중한다. 끊임없이 쉬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선 실은 내 숨, 한 숨 한 숨을 다 의식하며 살지 않는다.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새삼스러운 발견이 수련의 과정인 거다. 집중력을 붙들어 놓고 움직임을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 또한 숨이다. 이렇게 감사한 숨인데. 가끔씩 '턱' 숨이 막힌다(는 표현을 쓴다).
'생의 감각'을 흔들어놓는 것들을 찾고자. 영어 공부를 하고(뭔가 미래에 대한 대비, 사람과의 대화 자체도) 맛있는 것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와인을 따른다. 청소를 한다. 목욕을 한다. 화분 가지치기를 한다. 공연을 본다. 음악을 듣는다. 책 속에 펼쳐진 세계에 집중해 본다. ('작별하지 않는다' 속 제주도의 그 눈보라 속을 주인공과 함께 목도한다.) 산책을 한다. 카톡창에서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이렇게 쓴다.
바쁘지 않은 나날이다. 푹 자고 새벽 요가 가고 출근하고. 필요 없는 약속도 별로 없다. 그리고 필요 없는 약속을 굳이 잡지 말자고 생각하는 나날이다. 멀어졌던 친구가 돌아오고 간간이 여행 다니는 이번 겨울이다. 연휴에는 가족을 만나고 공연을 볼 것이며 템플스테이도 예약해 두었다. 곳곳에 생의 단서들을 흩뿌리는 중인데. 간간이 이렇게 채워졌다가 다시 공허해졌다가. 그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