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의 밤은 늘 활기찼다. 오래된 간판이 켜진 골목길 사이로 빛나는 불빛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이며, 시간을 잊게 만들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난 금요일 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포면옥'에서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말투와 농담. 겉으로 보기엔 마치 우리가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이번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와 탄핵 소식이 연일 화제였기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 주제가 안주로 오르고 있었다. 세상은 혼란 속에 빠져 있고, 친구들 역시 분노하고 있었다. 그 분노를 표출할 방법으로 소주 한잔에 서로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었다.
어떤 친구는 "괜히 정치 이야기 꺼냈다가 분위기 망칠까 봐 참았지만, 이게 세계 10위권의 나라에서 일어날 일이냐?"라고 했고, 또 다른 친구는 "잘못된 건 알겠는데 우리같이 평범한 시민들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현실을 무시할까 봐"라며 속내를 털어놨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깨달았다. 분노와 안타까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지만, 그 감정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숨겨져 있었다. 우리 사회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문제를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거나 그저 일상의 평온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을지로의 불빛은 여전히 밝았다. 친구들과 나눈 대화는 끝이 없었고, 내게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들을 함께 나누며 더 나은 길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어쩌면 우리의 작은 생각과 행동이 세상의 변화를 이끌 씨앗이 될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동지를 하루 앞둔 12월 20일 겨울밤이었다. 낮부터 묵직한 구름이 깔리더니 눈발이 날렸다. 날씨가 추웠지만 어쩐지 낭만적인 풍경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우산도 없던 우리는 을지로입구 전철역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폭설이 예보된 동지의 전날 밤, 모든 것이 차분하면서도 생동감 있었다.
전철에 올랐을 땐 이미 승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연말 송년회와 금요일의 회식으로 각자의 하루를 마친 직장인들로 떠들썩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지친 표정으로 좌석에 앉아 있거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나는 잠실역에서 환승하여 버스역으로 향하였다. 다행히 좌석에 앉아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창밖의 눈발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생각들에 잠겼다.
길가에는 커다란 눈꽃이 피어나듯 눈이 쌓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눈송이들이 어딘가 차갑고도 포근해 보였다. 눈발은 점점 더 거세졌다. 눈송이가 바람에 휘날리며 춤을 추는 모습은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풍경에 매료되어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이 거친 눈발은 다음 날 아침, 도시를 하얗게 덮을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어쩌면 고단한 일상 속에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흔히 스쳐 지나가는 겨울의 밤도 이렇게 눈이 내리면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된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마음 한편이 따스해지는 풍경, 그것이야말로 겨울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작은 눈꽃 하나에도 설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문득 미소를 지었다. 차창 너머로 보이던 풍경은 겨울밤이 주는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