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다녀왔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침식사 한 끼를 함께했다.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고동색 싱글 양복을 입고 계셨다.
모자도, 구두도, 심지어 지팡이까지 같은 색감으로 가지런히 맞춰 입으셨다. 변함없는 봄가을 정장 패션이다.
그 단정한 모습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걸음은 달랐다.
허리가 많이 굽으셨고, 성큼성큼 걷던 걸음은 쭈뼛쭈뼛 힘겹게 옮겨졌다.
횡단보도를 건너실 때였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걸음을 옮기셨지만, 아직 반대편에 도착도 못했는데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아버지의 팔을 잡고 걸었지만 그 순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마음 한가운데서 터졌다.
가슴이 아릿했다.
세상 누구보다 당당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처음으로 작고 위태롭게 느껴졌다.
식당에 도착해 콩나물해장국을 다 비우시는 걸 보며
‘아직 식욕은 있으시구나’ 하는 안도감조차도 슬픔과 뒤섞였다.
단골 식당 주인 부부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반겨주었다.
서비스로 모주 한 잔과 쇠고기 장조림을 넉넉히 내어놓는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아버지의 빈자리를
이토록 따뜻하게 기억해 준 이들이 있다는 게 고마웠다.
아버지는 친구 분들 이야기를 꺼내셨다.
예전부터 함께하던 친구들이 배우자 병간호로 마음이 닳고 있다는 이야기,
자식에게 의지하다 못해 미안함에 모임조차 나오지 않게 된 친구 이야기...
그렇게 주말마다 즐기시던 당구 모임도
자연스레 흩어졌다고 하신다.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쓸쓸함이 묻어나는데,
나는 도무지 어떻게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몰랐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조심스레 내 걱정을 꺼내신다.
내 아이들의 직장생활은 괜찮냐고 물으신다.
전주에 사는 막냇동생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신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고단함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신다.
어쩌면 아버지는 늘, 자식들의 삶을 통해서만 자신의 하루를 살아오신 분일지도 모른다.
헤어질 때, 아버지는 다시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예전보다 훨씬 차가워진 손이었다.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으신 탓이리라.
그리고 말씀하셨다.
“절대 서두르지 말아라.
유유자적 살아가라.
무리하지 말고...
욕심도 부리지 말고...”
그 말씀을 듣는데, 왜 그렇게 울컥했는지 모른다.
무심한 봄바람이 불었고, 벚꽃이 휘날렸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택시가 올 때까지, 아버지는 그 자리에 서 계셨다.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해도 움직이지 않으셨다.
한참을 그렇게, 흔들리는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곧 아흔을 앞두고 있는 아버지.
걸음이 느려지고, 청력이 약해지신 것을 빼면
여전히 웃음 많고, 따뜻한 분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평생을 교육에 헌신해 온 아버지는 아버지 자신보다 자식들의 삶을 더 깊이 걱정하며 살아오신 분이라는 걸.
오늘따라 아버지의 목에 깊이 파인 주름이 자꾸 눈에 밟힌다.
버스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 속에서도
아버지의 백만 불짜리 미소가
자꾸만 떠오른다.
그 웃음 뒤에, 말하지 못한 수많은 염려와 사랑이 겹겹이 쌓여 있다는 걸 나는 이제 조금씩 알아간다.
*아버지는 자신의 모교와 부임학교마다 방문하여 장학금을 전달하신 진정한 '교육인'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