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디스크 극복 수필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오는 언제 보아도 금실 좋은 부부를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허리 디스크 파열로 인한 요통 및 하지 통증이 극심하여 척추 내시경 수술을 받았던 남편과 그 곁을 잠시도 비우지 않고 지킨 아내의 얼굴에는 이전의 깊었던 수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웃음으로 가득하다.
정기 외래 진료에서도 통증이 없어 치료를 종결하기로 하고 작별 인사를 나누려는 찰나 환자의 아내가 작은 선물과 함께 편지를 전해 주며 아쉬운 이별을 고한다.
분홍빛 편지 봉투 안에 수줍게 접힌 세 장의 아기자기한 꽃 그림이 그려진 편지지에는 그간의 사연을 담아 절절히 써 내려간 손글씨가 가득히 스며들어 있다.
가슴 먹먹한 감사를 담은 편지지의 잉크 냄새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순간 오늘의 진료실에 앉아 있던 나는 어느새 환자와의 첫 만남이 있었던 4개월 전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처음 진료실에 앉아 구구절절한 사연을 읊조리던 환자는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업무로 인한 만성 요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일과 삶의 밸런스를 강조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걸고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일 수 있다. 아프다고 쉬기는커녕 치료를 위해 병원을 방문하는 것조차 행여나 동료들에게 피해가 갈까 쉽사리 시간을 내지 못했다. 퇴근 후 마사지도 받아보고 찜질도 해보았지만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요통에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한다. 아빠와의 행복한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들과 놀아주고 싶었건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를 안아도 찾아오는 요통에 걱정이 커져만 갔다.
증상은 점점 악화되어 누워도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였고,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어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도 곧 찾아오는 요통에 쉽사리 잠이 들지 못하고 통증으로 새벽마다 잠을 깨니 수면 부족에 만성피로, 이제는 우울증까지 찾아올 지경이었다.
좋아지겠거니 막연히 기다리던 바람은 점차 다리까지 저려 내려오는 악화 증상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고, 결국 반차를 내고 어렵사리 병원을 처음 찾은 것이었다.
통증이 악화되어 방문하는 환자들 중 많은 수가 생계를 위한 일을 하면서 얻은 병이고, 치료를 하더라도 충분히 회복하지 못한 채로 어쩔 수 없이 다시 복귀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이 가장의 무게, 삶의 무게일 것이고 나에게도 주어진 무게이기에 환자의 상황이 더욱더 안쓰럽게 다가왔다. 내원하여 시행한 신체 진찰에서 통증의 원인은 척추 관절의 퇴행성 변성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엑스레이에서는 이미 뼈 사이 공간이 좁아져 협착증이 진행되고 있어 이러한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음을 직감하고 지속되는 통증의 원인이 되는 구조적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자기공명영상검사(MRI)를 시행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무너져 내린 뼈 사이의 디스크 연골이 후방으로 탈출되어 신경을 압박하고 있었으니 그간 요통과 하지통의 원인은 마침내 속 시원히 밝혀진 셈이다.
하지만 허리 디스크 파열이라는 진단에 온갖 시름이 얼굴에 얹힌 환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원인을 밝혀낸 뿌듯함은 뒤로 하고 환자가 받았을 충격과 혼란스러움을 다급히 진정시키도록 자세한 설명을 이어간다.
통증이 지속되어 신경외과를 방문한 뒤 디스크탈출증이나 협착증이 진단되었다고 해서 덜컥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다. 사실 인구의 80% 정도는 평생 한 번 이상 요통을 경험할 정도로 감기만큼 흔한 증상이며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디스크 탈출 정도나 협착 정도가 통증과 정비례 하지 않다고 보고가 되고 있고 실제 임상에서도 통증 치료 실패로 수술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매스컴이나 인터넷 덕분에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이러한 진단명은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가 되어 그대로 '평생 허리디스크 탈출증 환자'가 되고 '평생 허리 협착증 환자'가 되어 버린다. 진단 기술의 발달이 가져오는 역설이랄까? 모르는 게 약일 수 있고 많이 아는게 독이 될 수도 있다.
통증은 무엇인가? 통증은 우리 몸의 아우성이다. 원인을 찾아 교정 하라 기회를 주는 내 안의 소리이지 덜컥 문제 부위를 잘라내 없애라는 외침은 아니렷다. 그렇기에 이러한 아우성은 신의 축복이다. 통증이 없었다면 우리 몸은 단 한 곳도 성한 곳이 없을 것이다.
통증의 원인이 되는 탈출된 허리 디스크는 흡수될 수 있다. 허리 디스크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성분은 물(水) 이며 만약 허리 디스크가 탈출된 경우 이 수분이 증발하면서 부피가 감소하고 우리 몸의 면역세포들이 돌출된 조직을 갉아 녹이기에 시간에 따른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조급해 말고 내 몸의 회복력, 면역력을 믿고 하나씩 단계적 치료를 할 것을 권한다.
물리치료, 진통소염제, 자세 교정 및 자가 스트레칭 교육을 통해 조금씩 몸에 변화를 주기로 하고 장기적으로 체중조절 계획을 세워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현재 탈출된 디스크가 신경을 자극하는 물리적 압박 이외에도 통증 부위 염증 반응이 심할 것으로 생각되어 신경차단술로 급한 불을 끄기로 하였다.
이미 통증을 담아내는 그릇의 물이 넘쳐 흥건하지만 작은 변화들로 넘치는 물을 조금씩 덜어낸다면 다시금 그릇 안에서 넘치지 않을 수 있다. 그릇 안의 물을 일시에 모두 비워낼 필요는 전혀 없다. 우리 몸의 회복을 위한 변화를 주기 시작하고 내 몸을 믿는 확신만 있다면 올바른 통증 치료는 시작이 반이다.
사실 통증 제거에만 온전히 초점을 맞추면 내 몸의 자가 면역에 의한 회복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척추 디스크로 인한 통증 치료에서 빈번히 문제로 제기되는 과잉진료에 대한 지적은 어쩌면 통증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의사의 열망, 그 통증으로 괴로워하는 환자의 요구, 그리고 신체의 자가 회복능력에 대한 무지 혹 불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성급한 결정은 자칫 후회를 남길 수 있다. 첫 진료 및 치료 후 어느 정도 증상의 경감을 확인한 뒤 명함을 챙겨 돌아가는 환자를 보며 험난한 길이겠지만 함께 잘 극복하기를 응원한 것이 일주일 전이었다.
일주일 뒤 다시금 환자와 연락이 닿은 그 날은 추석이었다.
가족과 오랜만의 휴식을 취하고 있던 명절 연휴, 식사 후 함께 산책하러 나가려던 참에 이메일 수신 알람이 떴는데 제목부터 왠지 심상치가 않았다. 걱정스레 이메일을 열어보니 지난 마지막 치료 이후 호전되던 통증이 추석 당일 격렬히 악화되어 누운 채 일어날 수조차 없었고 끝내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까지 실려 갔다는 다급한 소식이었다.
연휴에 무례를 무릅쓰고 연락을 드린다는 정중한 말투 속에는 다급함과 초조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극심한 통증에 고통받았을 환자와 일어나지도 못하는 남편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난생처음 119에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불렀을 아내의 당혹감이 눈앞에 그려졌다.
응급실에서의 진통소염제 처방 및 통증 주사 처치는 통증 완화에 그리 효과가 있지도 오래가지도 않았다. 극심한 통증 앞에 무력감에 빠져 있던 중 생각나는 건 외래 진료 후 받아온 명함 한 장의 이메일 뿐 이었던 것이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급하게 이메일을 보낼 수밖에 없던 그 애절함을 어찌 외면할까. 즉시 위로의 말과 함께 치료를 위한 만발의 준비를 할 터이니 연휴가 끝나자마자 바로 내원하시도록 답신을 보냈고 그렇게 외래에서 다시금 극적인 상봉을 한다.
신경학적 평가와 영상 검사를 해보니 발목의 힘빠짐(족하수)이 진행되었고 허리 디스크 탈출증이 더욱 악화되어 조절되지 않는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이에 당일 국소마취하에 약 40분에 걸친 척추 내시경 수술을 안전히 시행하였다.
허리 디스크 파열에 의한 통증은 탈출된 수핵 덩어리에 의한 염증 반응에 더하여 물리적 압박으로 통증 강도가 더 커지게 되는데 이로 인한 통증이 조절이 안 되고 족하수 등의 힘 빠짐이 동반된다면 결국 수핵 덩어리를 제거하여야 한다.
과거 파열된 디스크 수핵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피부 절개 후 뼈를 깎아 낸 뒤 신경을 덮고 있는 인대까지 잘라낸 후에야 이를 제거할 수 있었지만, 내시경 수술의 술기와 기구가 발달하면서 수핵이 터져 나온 자리에 바로 직경 8mm 관을 삽입하여 수핵 덩어리에 선택적 접근 및 효과적인 제거가 가능하게 되었다.
신경의 압력이 줄면 통증은 바로 호전되기에 내시경이 들어갔던 수술 부위 통증과 다리의 다소 뻐근한 느낌 외에는 증상이 거의 호전되었고, 발목의 힘 빠짐 또한 보행에 문제없을 정도로 개선이 되어 담당 주치의인 본인이나 환자 부부 모두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다음날 무사히 퇴원을 하고 약 4개월간의 정기 외래 검진을 통해 통증의 재발 없이 완벽히 호전됨을 확인 후 치료 종결을 한 그날에 받은 편지의 사연은 이랬던 것이다.
추석 당일 아침 난생처음 119에 전화를 하고 구급차까지 탔을 때의 당혹감
그리고 이어진 며칠의 서툰 간병과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그냥 볼 수밖에 없던 무력감 가깝던 응급실도 유난히 멀게 느껴졌던 초조함, 다시 걸어서 집으로 올 때의 안도감.
사춘기 시절처럼 널뛰는 감정 기복을 겪은 환자의 아내는 지나간 그 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폭풍 속 악몽 같은 1주일을 보내며 이제서야 긴장이 좀 풀리나 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지나간 시간이 되었다는 게 기쁘면서도 마치 꿈을 꾼 듯 실감이 나지 않네요.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환한 미소와 건네주신 따뜻한 말씀들은 통증으로 예민해진 환자와 불안이 가득한 보호자에게 정말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절박한 마음에 선생님께 직접 메일을 드리고도 무리한 부탁임을 알기에 큰 기대는 안 했는데 답장을 받고서 어찌나 감사하던지 눈물이 왈칵 나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코끝이 시큰하네요. 남편의 경험은 저에게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남편의 걸음이 느려지다 보니 같이 보조를 맞추어 길을 걸을 때도 횡단보도의 신호에 느리게 걸을 수밖에 없는 어르신들의 입장도 알게 되었고, 건강과 관련하여 작지만 좋은 습관들을 이미 갖추었어야 할 30대 중후반임에도 일상에 치여 그저 미루던 평소의 행동도 돌아보았어요. 그리고 시술 전후로 함께 있는 시간 동안 우리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다시 세워보았습니다. 몸의 중심에서 작은 동작 하나에까지 영향을 주는 척추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이나마 남편이 평소의 유쾌함을 잃었는데 이제 다시 원래의 모습을 찾았습니다.
연내에 아파트 입주도 있고 중요한 회사업무도 있어 지금 치료받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 지요. 모두 선생님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관리를 잘하도록 곁에서 도와야겠어요. 이제서야 창밖의 풍경도 눈에 들어와 변해가는 계절을 느낍니다.
어느덧 10월, 가을도 점점 깊어갈 텐데 항상 건강유의하시길 바랍니다.
마음 써주시고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나는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를 가장 좋아한다.
지금의 복이 언제 화가 될지 지금의 불행이 언제 다시 행복으로 바뀔지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다. 길흉화복이 휘몰아쳐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한다면 지금의 불행이 다시 행복으로 바뀔 수 있다.
이번 소동이 이 부부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이런 아픔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겪게 되는 여러 파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위기 순간을 어떻게 극복해 내는가에 있다.
편지를 읽고 이 부부는 참 지혜롭게 이번 경험을 인생의 값진 교훈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앞으로도 충분히 그들 앞에 놓이는 또 다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의 결심이 잘 지켜진다면 아마도 우리는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쉬운 이별이 아니라 기쁜 이별이고 내가 의사로서 진정 바라는 이별이기도 하다.
오늘도 사연 가득한 이곳 진료실에서 어제의 감사함으로 오늘의 환자를 보며 내일의 회복을 기다린다. 오늘은 어떤 일생과 사연을 마주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