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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렇게까지 긴장하고 신경 써야 하는 일인가 싶은 마음에 말할 생각을 접어두었다가도 당신을 다시 마주할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머릿속엔 발표 직전의 어린아이처럼 상황의 경우의 수를 돌려보며 할 말을 곱씹고 중얼거리게 된다. 뭐가 그리 어려운 건지. 한숨과 함께
"그래 관두자"
"귀찮아서 그래. 말할 가치가 없으니까"
이런 상황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거라 자신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몇이나 될까? 필자의 감에 따르면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말해야 하는 상황이 어려워서 망설이게 되고 결국 포기하고 돌아서는 경험 말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가져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당신이 망설이고 고민하고 걱정하는 이유는 관계 때문이라는 걸. 당신과 그 관계를 맺고 있는 '누군가' 때문에 그리도 신경을 쓰는 거라는 것을. 고마운, 즐겁고, 행복한 내용의 말이라면 이토록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 섭섭하고, 미운, 싫고 짜증 나는, 화나고 답답한... 이런 말은 어떤가? 방금 전까지 "난 아닌데? 난 어렵지 않은데?"라는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어렵지 않아. 단지, 그냥 귀찮아서야 그 사람은 그럴 가치가 없기도 하고...
당신이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 귀찮은 일이다. 맞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은 그것이 다가 아니다. 사실... 당신도 알고 있지 않은가?
'어려운 얘기'라고 말한 것 안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상대가 거절할 가능성이 있는 부탁, 상대로 인해 상처받은 나의 마음, 마음에도 들지 않고 거슬리는 상대의 행동... 나열하기에도 벅차게 많은 이야기. 담겨있는 부담이 조금이든 많이 든 상관없이 이를 간직하고 있는 건 상당히 무겁다. 편하지 않다.
귀찮다고 한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 '안'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정도로 노력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내 입만 아프지"라며 쿨해보려 한다. 다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알고 있다. 그것만이 알맹이가 아니라는 걸. 말하기 어려운 것이고,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고, 그 말을 하게 될 직전의 어색한 분위기를 경험하기 싫은 것이며, 말하는 순간에 그 사람이 지을 표정과 말과 행동이 걱정되는 것이며, 마지막으론 그 상대가 그 말을 한 후에 나에게 찾아올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렵고, 걱정이 되는 것이다. 당신도 나도. 우리 모두가.
말해서 뭐 해, 바뀌는 게 없잖아. 바뀌는 게 없더라... 질문을 하나 건네고 싶다. 말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데 바뀌는 것이 없을지 어떻게 확신하는가? 그건 합리화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해보지 않았는데 그다음 상황이 어떨 거라 확신한다?
당신은 신이 아니다. 인간이지.
망각을 선택하는 사람들. 시도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바뀌는 것이 없다. 시도하지 않았기에 바뀌는 것은 하나 있다. 당신의 기회, 당신의 관계. 당신이 그 사람과 가지는 그 관계는 변한다. 진솔함은 옅어지고 불신은 짙어진다. 믿음은 옅어지고 체념은 진해진다. 그 상대는 당신의 진심이 담긴 솔직한 마음을 전해 들을 기회를 놓치게 되며, 서로가 서로에게 씌어준 '좋은' '절친한' '흠집 없는'... 많은 가면을 쓴 채로 함께할 것이다. 누구 하나가 그 가면을 내려놓을 시도를 할 때까지. 둘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의식하지 못하게 되며, 그 사실조차 잊고 살아가게 된다. 처음은 편하고 별거 아닌 거라 생각한 그 무게가 점점 더 커질 거라는 것을 모르고.
너무 어둡게만 보는 거 아니냐고? 뭐, 그렇다고 볼 수는 있겠다. 하지만 필자는 딱히 과장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계란 그렇다.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기에 때로 너무도 편하게 그 모양과 무게를 정하기 쉽다. 옆으로 치워두고 덮어두면 보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도 있지만, 기회는 멀어진다.
상대에 대한 마음은 떠버리고, 진하고 따뜻했던 무엇은 가볍고 차가워진다. 상대에게 느끼는 어렵고 걱정될 만한 얘기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슬프게도 어려워서 그 순간을 지나 보내고, 아닌 척. 괜찮은 척. 쿨한 척. 이해한 척. 아무것도 없었던 척..... 관계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진심은 '척'으로 변해버리고, 해보지 않았던 그 시도는 영원히 어려울 것이며, 그 이후에 다른 누구와도 솔직해지는 관계는 멀어진다. 관계는 마음을 놓아버린 그 순간에 갇혀버린다.
당신의 어려움을 두려움을 이해한다.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다. 필자 또한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사람'이기에 어렵다. 솔직해지기는 쉬울지라도 관계에서 진솔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솔직함과 진솔함은 다르다. 솔직함은 자기 자신만 고려하고 상대, 그리고 그 관계에 대한 마음은 없다. 그래서 이기적이기 쉽다. 상대가 듣기에 거북할 수 있다. 관계를 위하기보다 '오직 내가 마음 편하기 위한 해소'일뿐.
어렵고 두려운 이유는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관계가 당신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단지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은 어떨까? 오해하진 않을까? 괜히 기분만 상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해 못 하는 건 아닐까? 오히려 말해서 지금의 관계조차도 망가지면 어떡하지? 말한 뒤에 상대의 반응에 내가 상처받으면 어떻게 하지?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잃을까 봐. 지금 그나마 가지고 있는, 유지하고 있는 것을 모두 내놔야 하는 것이 아닐지 걱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상처받을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 관계가, 그 사람이 그토록 당신에게 가치가 없다면 뭐 하러 힘만 빠지게 그토록 많이 생각하고, 그 관계를 왜 유지하는가? 굳이 가치 없는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진심 없는 진솔함이 없는 관계를 일부러 가지길 원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소중한 시간과 돈, 노력을 쏟아서 그런 사람을 곁에 둔다는 것. 단지 혼자가 되기 싫어서 일 것이다. 관계를 위해서, 그 사람과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혼자가 되기 싫어서. 혼자가 될 수 없어서. 혼자가 되는 건 고통스럽고 두렵기 때문에.
당신의 그 말은 너무도 진심이다.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진솔함은 그래서 그 안에 진심이 담길 수밖에 없다.
상대와 더 깊고 진실된 관계를 가지고 싶어서 어렵게 꺼내 보이는, 망설이고 또 망설여서, 걱정과 고민을 넘어 조심스럽게 내민 그 말은, 당신의 모습은 너무도 진심이다.
화려한 수식어와 막힘없고 똑 부러지는 말투가 진심을 담는 것이 아니다. 너무도 어렵지만, 한 마디 한 마디, 걱정되는 마음을 안고서도, 떨리고 긴장되는 목소리여도, 감동적이고 멋진 말이 아니어도. 당신이 그 관계를, 그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 마음만 충분히 담겨 있다면, 진심은 전해진다. 이것만은 확신한다. 당신은 그 순간에, 그 관계에 너무도 진실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관계를 더 깊게 하고, 관계를 통해서 둘 이상의 사람에게 변화가 나타나는 순간은 때론 너무도 단순하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관계'가 모든 사람에게 그토록 소중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마음 놓고 내가 가진 진심을 충분히 담을 수 있는, 표현할 수 있는,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그렇게 진심을 담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또 다른 존재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온전히 혼자서 존재할 수는 있지만, 온전히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