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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9 은둔자

재능의 문

by 오필

석등이 희미하게 비추는 지하 화랑. 올곧은 기둥 사이, 낡은 벽돌로 이루어진 공간. 촛불들은 깊은 숨결처럼 흔들렸다. 황궁에서 열리는 정식 왕궁 교류 모임이 끝난 후, 이곳에선 어김없이 루카르 연합의 추가적인 모임이 진행된다. 루카르가 도착해 자리에 앉자 아르도라의 사절이 기다렸다는 듯 잔을 내려놓으며 먼저 말을 던졌다.

“오늘 그 소년, 꽤 눈이 맑더군요. 불씨 같은 눈이랄까. 도대체 어디서 그런 소년을 데려오셨습니까? 그런 눈을 가진 아이라면 꼭 한 번쯤은 써봐야만 합니다.”

테라노바의 사절이 바로 받아쳤다.

“불씨가 좋으면 불은 금세 번지지요. 다만 그 불이 어디로 붙을지는 아직 가늠할 수 없습니다. 라온델을 만나러 다녀오신 걸로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벤토라의 사절이 차가운 숨을 내쉰 후 말했다.

“그자에게 가는 길은 좁고 길어요. 한 걸음 잘못 들면 돌려세우기도 힘듭니다.”

마로바의 사절이 잔을 돌리며 빙긋 웃었다.

“그렇기에 물을 한 번 부어봐야겠지요. 불씨가 꺼질지, 증기로 변해 위로 오를지는 부어보기 전엔 모릅니다. 다만 저는, 오늘 그 아이가 들고 있던 종이 한 장이 마음에 걸립니다. 의도치 않게 흘린 것 같았는데, 문장의 결이 단단했습니다. 배운 자의 손길이더군요.”

아르도라의 사절이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마로바의 사절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하고는 루카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뜻이라기보단… 감이랄까요. 루카르대신께서도 그 결을 느끼셨겠지요.”

루카르는 잠시 침묵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하고, 명료했다.

“카일리스. 그 아이는 시장에서 시를 읊었고 모두를 사로잡는 언어를 구사했다. 저 어린 나이에 샤트란지판에서 그 잘난 이시토라를 꺾었지. 감정이 필요할 땐 모두를 사로잡았고 감정이 필요 없을 땐 날카롭고 정확했다.”

카일리스에게 관심을 가지던 아르도라 사절은 다급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다면 시험해 보시죠. 불은 붙여봐야 불이 됩니다. 말의 온도가 그 정도라면, 그들의 전장판을 입으로도 뒤집을 겁니다.”

안정을 추구하는 테라노바의 사절은 카일리스에 대한 정보가 없기에 조심스러웠다.

“그런 아이일수록, 손에 쥘 땐 장갑을 껴야 합니다. 감정과 이성이 둘 다 빠른 자는, 언제나 계산도 빠르니까요.”

마로바의 사절은 루카르의 미세한 감정을 읽어 이미 결정되었음을 대신 언급한다.

“증기를 만들어 올리든, 꺼트리든 방법은 하나뿐이겠지요. 대신께서 직접 불을 끌어오셨으니, 우리는 그 온도를 지켜보면 됩니다.”

루카르는 촛불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낮고 날카롭게 말한다.

“라온델에게 다시 한번 갈 생각이었지.”

그의 손끝이 잔의 표면을 두드렸다. 딱, 딱.

“그러나 생각을 바꿨다. 라온델에게 카일리스를 보낸다. 카일리스는 불씨가 아닌 바람이다. 오히려 불씨는 라온델이겠지. 불은 바람을 부르고, 바람은 불을 키운다. 그 둘이 부딪히는 순간, 우리는 그 방향을 본다.”

벤토라의 사절이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라온델이 그 아이의 언어를 듣는다면, 단숨에 흥미를 느낄 겁니다. 하지만 그 흥미는 곧 예측 불가능함입니다. 불이든 바람이든, 둘 다 방향을 잃으면 잿빛이 되지요.”

루카르는 그 말을 가로막지 않았다. 다만 목을 축인 후 잔을 내려놓으며 짧게 답했다.

“그래서 내가 멀리서 지켜본다.”

바람이 불지 않았음에도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듯 흔들렸다. 그 순간, 화랑의 공기마저 숨을 죽였다.

이후 세바스티안과 알베르트에 관한 안건,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점검한 뒤 사절들은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항상 먼저 자리를 나서던 루카르가 처음으로 사절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홀로 남아 촛불의 불씨를 바라보고 남아있었다.


밤이 깊어 문관들도 자리를 비운 시각 지상으로 오르는 좁은 계단을 지나 향냄새가 희미하게 번지는 복도 끝에 루카르 있다. 그곳엔 촛불 하나만이 남아 있었고 그의 시선은 카일리스를 향했다. 루카르는 연회의 잔향이 남은듯한 카일리스에게 감정의 온도를 측정할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흥미로운 날이었지. 불씨가 들어와 공기의 흐름을 바꿨다.”

그는 잠시 카일리스를 바라보다가, 마치 이미 정해 놓은 문장을 꺼내듯 덧붙였다.

“문을 두드릴 사람이 필요하다.”

“문이라면 어떤 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루카르는 붉은 밀랍이 얇게 번져 있는 작은 밀봉서를 내밀었다.

“시장 외곽의 공방. 라온델.”

카일리스는 밀봉서를 두 손으로 받았다.

“전해야 할 말씀이 따로 있으신지요?”

“전해야 할 말은 문서에 있다. 그러나 문서의 글만으로는 문은 열리지 않는다.”

루카르는 촛불을 손등으로 가리며 미묘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오늘 네가 연회에서 보여준 그 리듬, 말의 숨으로 빈자리 먼저 만들어라. 완성된 대답을 내지 말고, 미완의 질문을 건네라. 그는 너의 질문에 약할 것이다.”

카일리스가 짧게 숨을 고른다.

“필요한 형식이 있으신지요?”

“비공식. 기록 금지. 사람만 남긴다.”

루카르는 한 치도 흔들림 없이 이어 말했다.

“그가 듣고, 되묻고, 멈추는 순간을 각각 기억해 온다. 그리고 돌아와 직접 내게 보고한다.”

“원하시는 시간이 있으신지요.”

“지체할수록 비용이 는다. 다만 오늘은 아니다. 밤과 새벽과 사이 사람들의 숨이 죽어있을 때가 좋다.”

루카르가 아주 미세하게 눈을 좁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네가 시험을 보러 가는 것처럼 보이게 두어라. 실제로는 네가 시험을 치르게 할 것이다.”

루카르는 마지막으로 촛불을 스쳐 지나가듯 손을 내렸다. 불빛이 잠시 떨렸다가 바로 섰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고친다고 믿는 사람. 네가 가져갈 건 능력이 아니다. 그의 능력이 닿지 못하는 그 순간을 보라보는 눈이다.”

촛불이 마지막으로 흔들리고, 카일리스는 고개를 숙이며 밀봉서를 품에 넣었다.

둘의 대화는 조용히 닫히고, 연회의 향은 어린 소년에게서 멀어져 갔다.



밤의 냄새와 새벽의 냄새가 뒤섞이는 이른 새벽, 공방에는 금속 냄새, 잉크 냄새, 말라붙은 약재의 냄새가 층층이 깔려 있었다. 라온델은 불을 켜지 않은 채 작업대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다. 그의 시선에 있는 도면은 오래된 촛농이 굳어 있고, 반듯한 선들이 그어져 있다. 그때 톡, 톡, 톡. 문이 세 번 두드려지는 소리,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라온델은 상념에서 깼다. 그의 눈앞엔 손에 황궁의 밀봉서를 쥔 어린 소년이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황궁의 서신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황궁이라는 말에 라온델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불현듯 머릿속엔 공방에 들렀던 낯선 이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그대는 스스로의 재능이 황궁을 열 만큼 견고하다고 생각하는가?'

소년은 라온델에게 밀봉서를 건넸다. 붉은 밀랍 위엔 황궁의 인장이, 인장 옆엔 누군가의 서명이 적혀있었다. 라온델은 한참 봉투를 바라보다가 낮게 물었다.

“당신은... 황궁 소속이오?”

소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인사가 늦었군요. 카일리스라고 합니다."

어린 소년의 짧은 고갯짓, 대답에 라온델의 마음은 쓸려내려갔다. 봉투를 열지도 않은 채 소년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혼잣말인 듯, 전달하는 말인 듯 중얼거리며 말했다.

“황궁 집안의 자제인 모양이군 실력이 아니라, 순서대로 부르는 것이겠지.”

카일리스는 혼잣말인지 모호한 그의 말을 듣자 루카르의 임무가 떠올라 대화를 질문으로 이어갔다.

"저는 실력은 없으나 평민 출신입니다. 우연찮게 황궁의 눈에 띈 것이지요. 선생님께서는 그런 적이 없으신지요?"

잔뜩 말라붙은 잉크병 위에 빛 한 줄기가 스며들며 은은히 흔들렸다. 라온델은 눈길을 들지 않은 채 낮게 읊조린 후 분노도, 냉소도 없는 담담한 체념에 가까운 말투로 다시 한번 모호하게 중얼거리며 밀봉서를 뜯었다.

“우연이라... 황궁이 순서가 아닌 우연을 택한다면 세상은 이미 완벽했겠지.”

밀봉서 안 문서엔 짧은 내용의 글이 담겼다.


‘자네, 황궁 외에는 흥미가 없다고 했었나?

자네의 재능을 황궁이 기억하고 있다.

새로 들어온 내 제자를 보냈으니

자네가 가르침을 한번 줘보면 어떻겠나?

이번엔 자네, 라온델의 재능이

그 소년의 손끝을 통해 황궁에 닿기를 바라오.

황궁 정무실 대신관, 루카르’


읽는 순간 라온델의 얼굴에 미묘한 균열이 일었다. 그는 문장 속에서 전달하는 뜻을 단번에 읽어냈다.

'이번엔 명백히 황궁의 눈으로 너를 시험하겠다.'

문서를 내려놓으며, 카일리스를 쏘아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이보시오. 어린 소년.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소?"

"전 맡은 일을, 밀봉서를 전하러 왔을 뿐입니다.”

그 말에 라온델은 미세하게 겸연쩍은 미소를 지은 후 웃었다.

“그게 가장 무서운 대답이지. 맡은 일만 전하는 사람. 황궁의 눈에 띄었다고 했소? 황궁과 왕궁엔 실력이 아니라 질서가 있다네. 질서엔 언제나 순서가 있지. 나는 그 순서 밖의 인간이었고, 그래서, 아직 이곳에 있는 것이오.”

카일리스는 답을 얻기 위함이 아닌 물음을 위해 대화를 이어갔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습니까?"

라온델의 목소리엔 냉소와 함께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한 피로가 섞여 있었다.

“그래. 바로 그게 문제지. 자네는 배우러 온 줄 모르는 자이고 나는 가르칠 수 없는 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새벽 공방의 냄새가 다시 짙어졌다. 금속, 잉크, 약재, 그리고 그 사이의 무언가 라온델의 오래된 꿈의 냄새. 카일리스가 무언가를 말하려 하자 라온델이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카일리스를 단순히 어린 소년이라고 하기엔 눈에서부터 느껴지는 흔들림 없는 견고함이 너무나도 눈에 띄었다.

"자네는 어쩌면 나보다 단단할지도 모르겠소. 그것이 재능이라면 재능일지도 모르지. 문이 열릴 때 스스로 들어간 자와 그 문이 열렸음에도 바라보다 멈춘 자는 다르니까.”

말이 끝난 후 봉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자는 내 손을 빌리려는 게 아니라, 내 의중을 떠보는 것이겠지.”

"문서의 내용대로라면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알려주시는지요? 괜찮다면 여쭤도 되겠습니까?"

라온델은 이내 완전히 체념한 듯 웃으며 답했다.

“아니오. 지금은 아니오. 지금은 이 서신이 아니라, 자네가 어떤 눈으로 이걸 들고 왔는지가 더 중요하오. '황궁의 문턱을 밟은 평민이라... 그 말속엔 아마 나를 비추는 거울이 있겠지.' 자네 덕에 잘 알겠소. 내 그릇은 아직 여기에 있다는 걸.”

말을 마치자 루카르의 말이 다시금 머리에 울렸다.

'그대는 스스로의 재능이 황궁을 열 만큼 견고하다고 생각하는가?'


라온델은 카일리스가 떠난 후 항상 열어두었던 공방의 문을 처음으로 단단히 걸어 잠갔다. 아직 가시지 않은 새벽 냄새를 홀로 맡으며 문서를 다시 펼쳐, 손끝으로 글씨를 더듬었다. 그 문장 하나하나가 황궁의 손끝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에야 황궁의 문을 자신이 열고 싶다고 해서 열 수는 없다는 걸 완전히 인정했다. 황궁에서 온 밀봉서와 이날의 대화로 공방의 호흡은 완전히 뒤바뀌었고 그에겐 자조가 아닌 결심의 잔향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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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자 키워드 - 고독, 성찰, 깨달음

라온델은 자신의 능력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믿었다.

이는 과신이었으면서 과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 겸손하다고 믿었으나 때로는 겸손하지 않았었다.

뛰어난 부분이 있는 만큼 아직 부족함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상의 뛰어난 능력을 갖추기에는 라온델은 혼자였다.

혼자서는 황궁이라는 견고함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깨달음의 방향을 어떻게 잡는지가 그의 인생의 갈림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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