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속 선택의 기회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이른 새벽, 포르투나 엘렉티오의 중심부 시장.
이른 시간, 자리의 천막을 걷는 사람 중에 한 명, 필리네오스라는 노인이 있다. 그는 늘 그렇듯 아무도 없는 천막에서 홀로, 오래된 원반을 조심스레 돌려본다. 삐걱이는 축소리만이 고요한 천막 안을 채운다.
"새로운 운명의 흐름이 나타난다라..."
낮게 중얼거린 그의 목소리는, 오래된 목재의 숨결과 뒤섞여 사라진다. 사람들은 이 노인, 필리네오스를 점술가라 불렀다. 그러나 필리네오스는 자신이 돌리는 운수판을 점술 도구, 운명의 도구가 아닌 인생의 방향을 찾는, 스스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도구라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겐 점술가라는 운명이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는 점술가가 되기 전 시장의 골목, 헌책방에서 장사를 하던 평범한 상인이었다.
헌책방을 운영 중이던 젊은 시절의 필리네오스.
나는 가게로 들어오는 기록과 교역을 믿었다. 세상은 거래의 질서로 움직이며, 인간의 의지는 문장과 숫자, 약속으로 보존된다고 믿었다. 그 시절의 골목은 늘 잉크 냄새와 먼지로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나이임에도 총명한 눈빛을 지닌 소년이 헌책방을 들렀다.
소년은 다양한 책을 둘러보다 관리를 맡고 있는 최신 교역 자료를 뒤적거리더니 다짜고짜 그것이 틀렸다며, 이곳에서 자신이 일을 하며 모두 고쳐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처음엔 달래서 내쫓을 생각으로 어린 소년의 말을 전부 다 들어주었다. 그랬더니 소년의 말처럼 교역 자료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날 나는 평생을 믿어오던 세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관리를 맡기로 한 최신 교역 자료를 제외하면 책방의 다른 책과 문서의 내용들은 진실되었다고 그 소년이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단 하루, 단 한 번의 대화로 나이 불문한 채 그 소년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렇게 혼자 운영하던 헌책방에서 귀엽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루카르라는 소년과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루카르가 일을 시작하게 되자 다양한 장부들을 더러 맡게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관리를 잘해주고 틀린 것을 잘 찾아내준다며 찾아왔지만 모든 일은 루카르가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친한 사람에게는 루카르가 한 것이라 말해주었으나 도통 믿지를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광경을 바로 옆에서 보는 나조차도 믿기지가 않는다. 어느덧 이 삶이 익숙해질 때 즈음 또 다른 어린 소년이 헌책방을 방문했다. 잉크 냄새와 먼지로 가득한 이 골목에 도대체 언제부터 어린 소년들이 이렇게 드나들게 된 것인지 의아했다.
헌책방을 루카르에게 맡기고 틀린 세상의 질서가 아닌 새로운 질서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헌책방에 소홀해졌나 싶었다. 그래서 루카르에게 휴가를 주고 내가 한동안 맡겠다고 했으나 루카르는 극구 반대를 했다. 나는 장부의 틀린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하루라도 나오지 않는 날엔 사람들과의 신뢰를 잃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정말 백번 맞는 말이다. 그래도 그동안 정리,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을 관리하려고 헌책방에 붙어 지내던 중 다시 한번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자신이 잘난 것을 아는 콧대 높은 루카르가 헌책방을 방문했던 또 다른 그 어린 소년과 대등한 위치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세상에 나는 이 나이 먹도록 뭘 해온 건지, 언제부터 요즘의 소년들이 저리도 똑똑해진 것인지 놀랄 따름이었다.
어느 날은 두 소년이 낡은 장부를 뒤적이며 글자보다 빠른 생각으로 세상을 논하던 때였다. 나는 그 순간을 평생을 잊지 못한다. 종이 위를 스치는 손끝, 나무 의자에 부딪히던 작은 발소리, 그리고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두 소년의 목소리. 두 소년이 나눈 문장 하나하나가, 훗날 대륙의 방향을 바꿀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다. 설마 황자가 이런 허름한 헌책방을 방문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며 총명하게만 생각하던 평민 출신 루카르가 왕궁도 아닌 황궁의 대신관이 되리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현 황제 세르바부스께서 황자 시절 방문하던 나의 헌책방에 발길이 끊기셨을 때 즈음 또다시 헌책방을 루카르에게 맡기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나는 우연히 여사제님을 만나게 되었었다. 단 한 번의 일면식도 없었던 여사제님께서 마치 나를 알아본 양 다가와서 물으셨었다. 운명을 믿으냐고. 너무 당황스러운 상황이라 대답을 머뭇거리는 나에게 여사제님은 엘리안이라는 소녀가 자신의 후임이 될 것인데 먼 훗날 일이 생겼을 때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하셨다. 나는 너무 벙찐 나머지 이것은 계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사제님은 "계시는 과연 운명일까요? 단순한 메시지일까요? 운명을 믿으시나요? 당신이 운명을 선택할 수 있기를, 엘리안이 훗날 운명을 선택할 수 있기를, 계시에 거짓됨이 없더라도 운명이 바뀔 수가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서, 벙찐 나를 내버려 둔 채 홀연히 사라지셨다.
그날 이후 세상은 내가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돌기 시작한다고 느껴졌다. 믿었던 기록의 선은 루카르에 의해 무너지고, 교역의 질서는 세르바부스 황자의 명령으로 바뀌었으며 신의 질서조차 여사제의 침묵 속에서 방향을 잃었다. 내가 믿어오던 세상이 틀렸다는 것을 느꼈다. 그날 이후로 헌책방에서 멍하게 지내던 나는 떠나는 루카르를 제대로 배웅도 못해주고 멍하니 바라만 봤다. 세상에 대한 의심은 존재에 대한 의심이 되었고 나에 대한 의심이 되어 그렇게 무념무상으로 한참을 살아갔다. 그러던 중 어린 소년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된 이 골목, 이 헌책방에 마치 루카르를 연상시키게 하는 어린 소년이 방문했다. 그 어린 소년은 세르바부스 황자와 같은 연유로 이곳을 방문했다. 황궁이 쉬쉬하던 포르투나 엘렉티오의 진실에 대해서. 루카르와 비슷하면서 묘한 바람 같은 소년에게 나는, 나 스스로도 영문을 모른 체 이끌려 운명에 대해서 물었다. 그 소년은 물음에 답을 해주는 것이 아닌 나에게 운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되물었다. 아무런 경계심을 느끼지 못하던 나는 내가 겪은 일을 그 어린 소년에게 미주알고주알 말하며 다시 한번 운명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그 소년이 "운명은 돌고 돌아요. 과거의 진실은 현재의 거짓이 되기도 하고 다시 한번 미래의 진실이 되기도 해요. 그리니 운명은 선택에 따라 회전하는 것이에요. 선생님의 운명의 시작도 이 돌고 도는 것에 맡겨지면서 선택된 것 같아요. 전 여사제님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닌 그전에, 그날 운명에 대한 선택을 했기에, 전 여사제님을 만나는 운명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계시 또한 같은 거 같아요. 계시가 운명일지언정 선택은 언제나 본인의 몫이니까요. 선생님은 원치 않는 삶을 살아갈 때 운명에 삶을 맡기실 건가요, 아니면 원하는 삶을 위해 운명을 바꾸는 선택하실 건가요?"라고 말했다. 나는 왜 이리도 어린 소년들과 인연이 깊은 건지, 소년과의 대회 이후, 소년이 떠나간 자리 뒤로, 루카르가 떠난 후 남겨져 있던 장부판이 보였다. 늘 그 자리에 있었을 장부판이 마치 어디선가 나타난 것처럼 눈에 띄었다. 나무판은 손끝에 부드럽게 감겼고 운명은 돌고 돈다는 어린 소년의 말에 이끌려 장부판을 돌고 도는 원판으로 깎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운수판과 함께 점쟁이라는 선택이 탄생했다.
포르투나 엘렉티오의 중심부 시장.
새벽바람이 걷힌 뒤 시장의 소리는 어김없이 활기를 되찾았다. 바퀴 달린 수레가 돌며 돌바닥을 긁었고, 구리 종이 울리고, 사람들의 다양한 음성은 파도처럼 번졌다가도 다시 잠잠해기를 반복했다. 냄새와 빛, 소리와 바람이 뒤섞여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 낸다.
노인, 점쟁이 필리네오스의 천막 안은 언제나처럼 긴 정적이 깃들어 있었다. 운수판을 돌리는 시간보다 세상의 운명, 그리고 그 운명 속 선택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은 노인의 눈에는 반복되는 시장의 물결이 언제나 새로웠다. 잠시 감상에 젖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자 열 걸음 남짓 떨어진 곳에서 파도를 가르듯 사람들 사이를 지나오는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허름한 망토, 손에 쥔 지팡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그 사내는 마치 바람이 형상화된 듯했다. 사내가 천막 앞에 멈췄고 천막 앞 돌로 된 간이 의자에 앉아있던 필리네오스가 앉은 채로, 바람을 감싸듯이 조곤조곤 물었다.
“길을 잃었는가, 젊은이.”
“아니요. 이제는 길을 찾으러 왔습니다.”
필리네오스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미소 지었고, 미소를 머금은 채 천막 안의 운수판으로 시선을 지긋이 옮겼다.
“세상의 길은 돌고 도는 법이지.”
사내는 미소로 답했다.
“그래서, 그 회전이 멈추는 곳을 보고 싶습니다.”
바람이 불었다. 아무도 돌리지 않은 운수판의 축이 스스로 삐걱이며 한 바퀴를 돌았다.
운명의 수레바퀴 키워드 - 순환, 기회, 전환점
다른 대륙도 아닌 여사제가 계승되는 이곳, 포르투나 엘렉티오.
다른 대륙과 비교해, 일을 하기만 하면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이곳에서
필리네오스는 헌책방의 주인이 아닌 점술사가 되기를 택했다.
신의 계시를 직접 받는 여사제, 상담가로서의 여사제, 그리고 종교.
사람들의 불안을 다스릴 수 있는 명확한 수단이 갖춰진 이 대륙에서
글레이먼도 아닌 점술가를 한다는 것은 굶주림으로 직결된다.
풍족한 만큼 점을 취미 삼아, 재미 삼아 즐기는 사람은 있으나
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 풍족함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그가 점술사를 택한 것은 신이나 종교에서 말하는 운명,
그 운명을 점치는 것이 아닌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