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의 장풀

색연필 그림일기

by Eli

비가 오래 내리다 보니 한 해 보려고 심어 둔 일년초들이 모두 비에 녹아버리고 없다. 마당 한편에 치워 둔 화분에 본래 심은 꽃은 없어지고 닭의 장풀이 차지하고 있다. 집 주변에서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키운 걸까.


아버지는 큰 양계장을 운영하셨다. 부화된 병아리를 육계로 키워 시장에 공급하는 양계였다. 아버지의 농장은 순조롭게 운영되었고 규모도 컸다. 진학을 포기한 시골 큰 댁 오빠들까지 일꾼도 많았다. 동네에서 흔치 않은 기와집도 짓고 재산 목록 1호에 들어가던 TV도 안방에 놓였다. 그러다가 오일 쇼크가 왔다. 1차 쇼크 때는 어찌어찌 버티셨지만 2차 오일 쇼크가 왔을 땐 사료 가격이 10배쯤 뛰었고 그 사료조차도 구할 수가 없었다. 연탄을 사기 위해 가게 앞에서 가족마다 줄을 서야 했고 어머니는 자주 국수를 삶으셨다. 그러다가 설상가상 계사에 전염병이 돌아 닭들은 줄줄이 죽어나갔다. 동생이 태어나던 해 지은 기와집과 작은 장롱 같았던 TV에도 빨간딱지가 붙었다. 그 딱지처럼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의 주요 놀이터였던 산속 폭포 근처에다 노을이 질 때까지 죽은 닭들을 묻었다. 이듬해 봄이 되어 우리는 농장을 떠나야 했고 폭포 근처 닭들을 묻었던 곳에는 닭의 장풀이 군락으로 피어나 주변은 온통 서러운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행복했던 내 유년도 닭의 장풀의 서러운 푸른빛을 끝으로 그 집을 떠나며 마침표를 찍었다.


어른이 되어 그 푸른빛 풀의 이름이 '닭의 장풀'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닭의 장풀'이라니.... 그래서 그곳에 그렇게 많이 피어났던 것일까...... 아니면 그곳에 원래 닭의 장풀이 있었던 건가..... 기억에 없다. 내가 본 것은 이듬해 봄이 처음이었으니까. 화분에 허락도 없이 핀 닭의 장풀을 보니 마음 한쪽이 저린다. 뽑아버리려고 머리채 잡듯 당겼는데 뽑히지는 않고 화분이 통째로 들린다. 내려놓고 가만히 쳐다보다가 문득 인터넷 검색을 해본다.


닭의 장풀을 머리에 바르면 흰머리가 검어지고 장복하면 고혈압과 당뇨병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생즙을 내어 바르면 화농성 피부질환과 피부병에도 좋단다. 어쩌다 숲이나 야외에서 이 풀을 발견하면 기억은 브레이크가 없어 순식간에 과거로 달려가 죽은 닭들과 노을을 보던 아버지의 절망스러운 눈빛을 다시 보게 해서 마음이 아팠는데, 독초가 아니었구나. 닭의 벼슬 모양을 한 꽃을 피우고 세상에서 유익하게 쓰이려고 그렇게 피었나 보다. 기억은 여전히 아프고 무섭지만 닭의 장풀이 세상에 유익한 것이라니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그래서 그릴 수 있었던 그림.

닭의 장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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