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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워킹맘 Mar 20. 2020

전무님이 주신 택시비 2만 원

회사를 선택하는 당신의 기준은

내 손에 택시비 2만 원이 쥐어졌을 때, 작년 겨울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은 크리스마스를 3일 앞둔 날이었다. 무엇에 홀렸는지 '소자본 창업'을 주제로 한 강의를 덜컥 신청하고 내키지 않는 마음 밀어 넣으며 스터디 카페를 찾아갔다. 백팩을 메고 나타난 서른 초반의 앳된 강사, 수강생들도 하나 같이 젊었다. '내가 어쩌다 을지로역까지 왔을까?' 불편함을 감추며 강의장에 앉아 있었다.


"내가 원하는 회사의 필수 조건 세 번째는 회식 없는 회사입니다."


'앗!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빔 프로젝터는 '회식 없는 회사'가 적힌 ppt 화면을 또렷하게 비추고 있었다. 19년 회식 인생을 살아온 나에게 충격적인 문장이었다. 나에게 '회식'은 회사의 취직을 고려할 때 고민하는 선택의 기준이 아니었다. 입사 지원 원서를 쓸 때 '아무 곳이나 붙어서 엄마 고생시키지 말아야지'라는 생각뿐이었다.




"박 책임, 집에 어떻게 가지?"


"아, 저는 여기서 택시 타고 가면 됩니다."


"이거 받아. 갈 때 조심히 가구" 


전무님이 주는 택시비 2만 원을 넙죽 받아 버렸다. 그 서른의 강사라면 기겁했을 '회식'을 마치 나는 택시비까지 챙겼다. 2만 원을 손에 꼭 쥐고 택시를 타고 오면서 너무 뻔뻔했나 후회도 됐다. 구미로 입사한 어리바리한 여사원을 20년 가까이 보아온 전무님이 주셨기에 주저 없이 손이 나갔을 뿐. 그걸로 되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인생의 절반을 이 놈의 회사에서 보내고 있고 그 절반의 10% 정도쯤의 날을 회식과 함께 하고 있을까? 나는 '워라밸'과 '회식이 없는 삶'은 별개라 생각하는 꼰대가 되어 버린 걸까?     


스물이 넘은 아들 둘을 둔 사촌 언니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느라 바쁘다. "요새는 50 넘은 아줌마는 아르바이트 자리도 없어~" 웃으며 얘기하는 언니의 흰머리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일흔이 될 때까지 딸들 몰래 파출부를 뛰던 엄마는 이제야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하신다. 강남역 분식집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언니는 혼자서 일을 버거워하다 몸살이 나서 결국 때려치웠다. 다시 시작한 일이 교회 앞에서 호떡을 파는 거라고 말하는 바람에 내 속을 다 뒤집어 놓았다. 나의 곁에 있는 이 사람들이 회사(직업)를 선택하는 기준은 그저 많이 힘들지 않고 가능한 일요일은 쉬었으면 좋겠고, 집에서 가까우면 좋고.. 그 정도에 불과하다. 회사에서 의례히 갖는 회식을 경험해 보지도 못한 사람들.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보인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시리게 한다.


지금의 내가 다시 입사 지원서를 쓴다면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연봉? 복지? 워라밸? 내가 행복해지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내 삶이 퍽퍽하지는 않나 보다. 애 둘을 낳고 키우며 19년을 회사에서 버텨온 힘이 무엇일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좋은 회사 다니는 딸을 자랑스러워하는 엄마 때문이었다가 일을 제대로 하고 싶은 욕심이었다가 이젠 오래된 습관이 돼버린지도 모르겠다.


배움 욕심이 있어 새로운 강의를 듣다 보니 세상 사람들의 삶이 극과 극임을 실감한다. 밀리의 서재를 드나들고 N-잡러의 삶을 꿈꾸며 zoom 화상을 자유자재로 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엄마처럼, 언니처럼, 사촌언니처럼 안정적인 직업 하나를 절실히 바라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이 둘 사이를 헤매며 19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회사를 선택하는 나의 기준은 무엇일까?' 조금 더 생각해 보자. 20년은 넘기질 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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