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한 지도 몇 년째. 우울증을 진단받고 나서 그 전의 나와 다르다고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에너지가 말도 안 되게 없다는 거예요. 대학 다닐 땐 밤새 놀고 단 몇 시간 자고 9시 첫 수업부터 오후수업까지 수업을 듣고도 남을 에너지가 있었는데, 그때를 100으로 잡으면 지금은 에너지가 30도 안된다고 느낍니다. 이 정도의 에너지로 아이를 키우다 보면 집안일을 할 에너지까지는 남아 있질 않아요. 집은 점점 엉망이 돼 가고 음식을 만들어 먹는 건 생각도 못하는 지경이 됩니다. 배달음식으로 때우다 보면 한 달에 외식비만 수십만 원. 그리고 다음 달 카드고지서와 함께 오는 스트레스.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정리도 못하면서 또 뭘 그렇게 사고 싶었던 걸까요? 우울하고 공허한 마음을 뭔가를 사는 걸로 달랬나 봅니다. 사고, 사고, 또 사고. 사는 이유야 있죠. 이유 없는 물건은 없어요. 그렇게 우울을 달래기 위해 엄청나게 사들였던 물건들이 방 여기저기 쌓이고, 그걸 볼 때마다 정리가 안 돼 지나다니고, 밀고 다니고 비켜 다니는 게 일상이 되었고 정리는 고사하고 청소도 못하게 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사들였던 물건들이 또 스트레스가 되었어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에너지가 소진되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소진되는 느낌.
아이가 있기 전에는 에너지가 없으면 그냥 쉬면 되었지만, 지금은 아이를 키를 에너지를 비축해야 된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어요. 에너지를 아껴야 해요. 그래야 애가 왔을 때, 한 번이라도 더 웃어줄 수 있으니까요.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요.
먼저 어느 집에나 있다는 창고방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이사 후 미처 정리하지 못한 물건들이 쌓여있는 방입니다. 정리를 시작한 지 10분도 안돼서 힘이 없어서 방을 나왔습니다.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 내일 또 하자라고 생각했지만 며칠을 시도해도 나아지지를 않았어요. 아무리 정리를 하려고 해도 정리가 안 됐어요. 정리를 하려고만 하면 몸의 과부하를 느끼지도 전에 머리에서 먼저 과부하가 걸리는 느낌이었어요. 정리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쓰겠지, 나중에는 필요할지도 몰라 류부터 아까워서 못 버리나 류 를 지나서 추억이 담긴 물건류를 지나서 도저히 분류 못하겠다 류 까지 수많은 분류를 해야 하는데 머리가 분류는커녕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어지러워지면서 나중에는 생각자체를 못하게 돼버려서 방을 나와야 하는 날들이 계속되었어요.
그렇게 몇 달이 흘렀습니다.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외면하기를 선택했었죠.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지만요.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를 보는데 미니멀리스트에 관한 다큐를 보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미니멀리스트로 유명한 편집장이었는데 정말 물건이 없더군요. 캐리어 두 개면 될 것 같은 그의 짐을 보고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지금까지 정리를 못했던 건, 단순히 정리를 하려니 못했던 거였어요. 버릴 생각을 못했기에 정리가 안되었던 거죠.
기준을 다시 잡았습니다. 아주 심플하게.
내가 죽고 나서 남편이 정리하기 힘들 것 같은 물건은 무조건 버린다.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고 했지만 저는 내가 없으면 정리가 힘들 것 같은 물건은 무조건 버린다로 정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유품정리와 맥락이 비슷하네요. 유품정리를 죽기 전에 미리 한다는 게 다르지만요.) 그렇게 기준을 정하고 나니 버릴 물건들이 방의 반 이상이었습니다. 명절 때마다 받은 식용유들을 열 병씩 보관할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곳에 기부를 했습니다. 언젠가 입겠지 하는 옷들, 작거나 조금만 살을 빼면 입겠지 했던 옷들, 비싸도 작아져서 못 버린 옷 등 오늘, 지금이 아니면 입지 않는 옷들은 헌 옷 삼촌에게 팔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쓰지 않는 아이 용품이나 물건들도 당근에 팔았습니다. 그래도 쓰레기봉투로 열봉투 이상이 나왔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석 달이 걸려도 정리를 못했던 집을 삼주만에 모두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계속 비워지고 있는 중입니다. 물건들이 사라지니 정리안 된 집을 보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없어졌습니다. 청소에 들이는 시간도 1/3로 줄었고요. 집에 쏟았던 에너지를 아끼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스트레스가 줄어드니 아이를 대하는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습니다.
어쩌면, 정리의 이상한 기준일 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들은 들지 않을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에너지를 아껴서 아이에게 좀 더 쓰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정리가 미니멀리즘으로 연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