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생긴 일 ep30
“삐비비빅 삐비비빅”
토마스는 알람 소리에 잠이 깨었다. 새벽 5시였다.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녀를 보았다. 마리는 울고 있었다. 자신도 울었다. 왜 울었는지 설명할 순 없다. 꿈속은 항상 통제 영역 밖이다. 그녀를 바라보며 그 어떤 연민 같은 감정이 샘솟았던 모양이다. 꿈속에서 울었는데 깨어보니 베개가 젖어있었다.
눈은 떴는데 몸은 움직이질 않았다. 이건 움직일 수 없는 것에 가깝다. 예전에 고국에서 화이트 컬러로 일을 할 때는 아침마다 ‘귀차니즘’이라는 정신적인 저항과의 싸움이었다면 지금은 육체적인 저항이다.
어제 하루 종일 건물 실내 천장 공사를 했다. 3m가 넘는 천장에 3m짜리 화이어첵 지프럭(Frie-check plasterboard : 난연성 석고보드)을 하루 종일 붙였다. 그것도 두 겹(Double)으로. 호주는 소방기준이 까다롭다. 때문에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
스케폴딩 아래에서 2명이 지프럭 보드를 계속 올려주고 위에선 3명이 1m 간격으로 서서 지프럭을 머리와 한 팔로 받치고 보드를 천장 프레임에 붙이고 스크루를 박는 작업을 하루 종이 진행했다. 화이어첵은 일반 석고보드보다 그 무게가 한 층 더 무거웠다. 토마스는 점심 먹는 시간만 빼고 거의 쉬지 않고 로봇처럼 일했다. 다들 말할 힘도 없어 점심시간엔 밥만 먹고 모두가 각자 공사장 벽에 기대 쪽잠을 자며 오후의 체력을 보충했다. 어제는 정신없이 일을 하느라 몰랐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굳어버린 송장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팔을 들어 올릴 수가 없다.
“呜呜呜。我这么下去就快要死去了“(으아아아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몰라)
[Thomas, you should come here until 06:30 am, Ok? ] (토마스, 오늘은 여기로 06:30까지 가면 돼, 알겠지?)
한쪽 팔을 움직이자 신음이 터져 나왔다. 간신히 한쪽 팔을 움직여 핸드폰을 확인했다. 간밤에 사장한테 문자가 와 있었다. 문자에는 오늘 일할 현장의 위치가 구글 지도 위에 찍혀있었다. 어제는 퇴근하자마자 샤워를 하다가 샤워부스 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따뜻한 물줄기를 맞으니 마치 천국에 온 것 마냥 나른한 평온함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스르륵 잠이 들어버렸다.
“Hey! Hey! How long are you going to take a shower?“(쾅쾅쾅! 에이~ 이봐요! 샤워를 얼마나 하려는 거야, 도대체!)
집주인아주머니가 한 참 동안 나오지 않고 물소리만 들리자. 참다못해 욕실 문들 두드렸다. 토마스는 문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에 천국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그리고 알람 소리에 다시 눈은 떴다. 소리가 없었다면 토마스는 영면(永眠)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토마스는 이 현실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실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들은 고통을 유발했지만 꿈속에서 들었던 소리는 너무 아름다웠다.
‘마리…’
간밤에 또 꿈을 꿨다. 또 그녀가 나타났다. 이젠 이름도 알고 있다. 그녀를 두 번이나 현실에서 마주쳤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듣는 그녀의 플루트 연주는 토마스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가 되었다. 비록 꿈속에서 뿐이었지만. 그녀의 독주회를 홀로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그날 꿈속에선 마리가 울고 있었다. 눈가에 눈물을 머금은 그녀의 연주는 평소보다 더욱 리듬에 감정이 실린 것 같았다. 곡명을 알 수 없는 슬픈 연주곡은 그녀가 가진 모든 슬픔을 공기 중으로 울려 퍼뜨려 자신에게서 떼어내려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내는 울림은 공기의 떨림으로 꿈속에서 퍼져나갔다. 플루트 연주가 알람 소리에 오버랩되면서 토마스를 위한 그녀의 독주회는 막은 내렸다. 눈을 떴을 때 토마스의 눈가에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연주는 마치 자신을 위로하고 달래주는 것 같았다.
“天气变凉了呀“(이제 날씨가 많이 서늘해졌네)
새벽 6시가 조금 넘었다. 트레인 플랫폼에서 서서 열차를 기다렸다. 청록과 주황의 형광색 옷을 입은 육체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아침을 연다. 이곳은 블루와 화이트가 확연히 구분되는 곳이다. 입는 옷이 다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옷을 입은 채 하루 일과를 보낸다. 서로의 직업 정체성을 확실히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토마스는 호주에 온 이후 블루와 화이트가 확연히 구분되는 모습이 신기했다.
과거 토마스가 살던 세상은 블루가 화이트를 부러워하고 시기하던 세상이었다. 그러면서 블루는 화이트를 꿈꾼다. 화이트는 블루를 꿈꾸지 않는다. 자신이 블루의 삶을 살았다면 자녀는 화이트의 삶을 살길 바란다. 그럼 다음 세대에는 블루가 사라진다. 화이트만 존재하는 세상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블루가 없는 세상은 현실세계를 지탱할 수가 없다. 그럼 이 보이는 현실 세계 지탱해 줄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 토마스는 호주의 현실 세계를 지탱해 줄 블루가 되었다. 지금 트레인 안에 앉아서 아침 잠에 빠진 노동자들의 대부분이 그런 해외 이주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고국에서 블루였는지 화이트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이곳에서 대부분 블루의 삶을 살아간다.
그건 아마도 이곳에는 블루로 살아가도 다른 누구의 시선에 얽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며 또한 그런 블루가 화이트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각자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살아간다. 그래도 삶이 나락으로 가진 않기 때문이다. 이곳은 블루와 화이트가 서로의 영역을 당당하게 지키고 살아가는 듯 보였다. 육체적 힘듦과 정신적 힘듦의 가치를 크게 다르지 않게 생각하는 듯 보였다. 물론 정신적 노동의 영역에 있는 자들이 육체적 노동의 영역을 통제하기에 완전히 평등과 공정을 기대할 순 없지만 적어도 배려와 이해가 있어 보였다. 그들은 아마도 두 영역이 서로의 자리를 잘 지켜야 사회가 온전히 돌아갈 수 있음을 일찌감치 깨달은 모양이었다.
“这不是House工地呀 “ (여긴 하우스 공사장이잖아)
“你是谁?“(누구세요?)
토마스는 사장이 알려준 공사 현장에 도착했다. 펜스가 쳐진 하우스 공사장 앞에서 펜스 안을 들여다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한 젊은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형광색 옷에 안전화까지 신은 것을 보니 이 현장에서 일하는 자가 같아 보였다.
“我是许老板介绍而来的 “ (사장 소개로 오늘 여기 일하러 온 사람입니다)
“哦! 是吗?进来吧 “(아 그러세요, 들어오세요)
하우스는 스틸 프레임이 세워지고 지붕만 덮인 상태였다. 현장 앞에는 비닐에 싸인 지프럭이 한가득 놓여있었다. 토마스도 이젠 건축일을 좀 했다고 현장의 상황을 보고 나니 대충 다음 공정에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你看,今天我们俩得做墙壁“(보시다시피 오늘 벽을 세워야 하거든요)
“应该是吧“(아 네 그래 보이네요)
“昨天我把做铁做完了可你知道做板一个人做不到“(어제까지 프레임은 저 혼자 이래저래 다 했는데 보드는 혼자 붙이기가 어려워서)
“您是专门做铁的?“(프레임 머 기술자 이신가 봐요?)
“我呀?我随便做什么的“(뭐 이것저것 다 합니다 하하하)
그는 겉으로 보기에 토마스 보다는 손 아랫사람으로 어려 보였지만 그의 경력은 전혀 어리지 않아 보였다.
“给你喝一杯咖啡再开始工作吧“(여기 커피 한잔 하시고 시작하시죠)
“是,谢谢你 “(네 감사합니다)
“你叫什么名字呢?“(이름이?)
“我是Thomas“(토마스입니다)
“我是dingo. 你是从哪里来的 “ (전 딩고입니다, 근데 어디서 오셨어요?)
“我是来自台湾, 您是哪里人?“(대만이요, 당신은요?)
“啊, 我是韩国人“(아 전 한국사람입니다)
“嗬!真的吗?可你中文说的怎么这么好? “(헉!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중국말을 잘하세요?)
“哪里哪里,还差得远呢“(에이 뭘요. 아직 멀었는걸요 하하하)
“你这太谦虚了吧?“(너무 겸손 떠시는 거 아닙니까? 하하)
그는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서 믹스 커피가 담긴 종이컵에 부어서 토마스에게 건넸다. 그는 한국 사람이었다. 토마스는 그가 당연히 중국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어 발음도 거의 중국사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대만이랑 중국 본토 사람들과 발음과 억양이 좀 다르기 때문에 그의 발음을 듣고 당연히 중국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중국 사람 밑에서 일을 하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지프럭 플라스터 일 만 5년 넘게 했다고 했다. 보통 플라스터 일을 하는 사람은 중국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토마스도 여기저기 지프럭 건축 현장을 돌아다녔지만 한국인은 처음이었다.
“那我们开始工作吧 “ (자 그럼 일을 시작해 볼까요?)
다행히 오늘은 1.2m짜리 일반 지프럭 보드이다. 어제보다 훨씬 가볍다. 그리고 오늘은 천장이 아닌 벽이라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일을 시작하니 신기하게 다시 팔이 움직였다. 아침에는 마치 석고붕대를 감아놓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던 팔이었다. 막일 근육은 그렇게 뭉치고 풀리고를 반복하며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단단하고 질겨진다. 그래서 노가다를 오래 한 사람들의 근육은 쉽게 지치지 않는다. 고단백 식단으로 헬스장에서 단련되고 부풀려진 그것과는 다르다. 다양한 움직임과 상황 속에서 단련된 근육들은 생존에 가장 최적화된 근육이다. 크고 비대한 근육은 그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관상용 근육은 보기만 좋을 뿐이다. 근육도 관상용과 실전용이 다르다.
“你辛苦了,多亏你今天做板都做完了呀“(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오늘 벽을 다 붙였네요)
“哪里,都是dingo师傅教我好。 哈哈哈“(별말씀을요 딩고 사부님이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죠 뭐 하하하)
“不敢当, 看来你比我大我怎么会当个师傅呢“(에이 사부님이라니요 한참 형님이신 거 같은데… 하하)
“作为一个师傅跟年龄无关啊,可许老板什么时候来呢?”(사부랑 나이랑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근데 사장님은 언제 오시나요?)
“看来,他今天不来了吧, 怎么了?“(오늘 현장에 안 올 거 같은데요 왜요?)
“今天我得拿工资呢“(오늘 웨이지를 받기로 했거든요)
“你收现金是吧?“(현금으로 받으시나 보네요)
“是的·“(예)
“多少“(얼만데요?)
“3天的 450快”(3일 치 450불이요)
“许老板电话都接呢“(사장님이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네요)
“是吗? 这混蛋又开始。。。“(그래요? 아놔~ 음… 이 자식 설마 또…)
“刚你说什么”(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没有没有”(아무것도 아녜요)
딩고는 짜증 섞인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딩고는 허사장이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잠시 눈알을 위로 굴리더니 말했다.
“这笔钱我给你吧“(일단 제가 그 돈을 드릴게요)
“真的吗?可为什么呢?“(네?! 정말요?)
“我以后收我的工资的时候跟你的一起收就可以了,你都不知道什么时候再来工地这样空手回家可不好吧“(뭐 제가 나중에 사장한테 저거랑 같이 다 받으면 되니까요, 또 언제 일하러 오게 되실지도 모르는데 그냥 빈손으로 가시면 안 되죠)
“啊,真感谢你啊 “(아~ 감.. 감사합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일당직으로 일하는 노다가는 다음날을 알 수 없다. 부르면 가는 거고 부르지 않으면 또다시 다른 현장을 찾아야 했다. 딩고는 자신의 차에서 현금을 가져와 토마스에게 건넸다. 토마스는 이전에도 일당 치기 일을 나갔다 돈을 떼인 적이 몇 번 있었다. 항상 당일 일이 끝나면 일당을 지급하기로 해 놓고선 다음날 또 일이 또 있다는 핑계로 일당 지급을 하루하루 미루며 일을 계속 시켰다. 그렇게 미수금이 커지면 그 돈을 받기 위해 계속 그 자가 시키는 대로 일을 가야 했다. 쩐주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맘먹고 돈을 받을라 덤벼들면 연락을 두절하고 사라진다. 그들도 같은 이민자지만 이 땅에 먼저 왔다는 이유로 나중에 온 해외 이주 노동자들의 피를 빨아서 배를 불리는 인간들이었다. 그들도 이 땅에서 그렇게 당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대물림이다.
“我们这样见面也是个缘分你给我电话号码吧“(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연락처라도)
토마스는 딩고와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막일 밑바닥에서 처음으로 사람 같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세상에 사람들이 모두 악하지 않기에 삶은 계속 살아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