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55 (개정판)
집안이 담배연기로 자욱하다.
거실 바닥에는 빈 술병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그 날밤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머리 속을 맴돌며 나를 괴롭힌다. 고통을 잊어보려 마신 술은 마시면 마실수록 그 기억들을 더욱 또렷하게 재생시킨다.
“띵동 띵동”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다. 현관 벨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진다. 순간 그녀가 왔음을 직감했다. 나는 조용히 현관문을 열었다. 그녀는 예전처럼 현관문 옆의 벽에 기대어 앉아있다. 그녀가 고개를 든다. 푹 눌러쓴 검은 모자가 시선을 가린다. 모자 창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입술 한쪽은 터져서 굳은 핏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힘겹게 일어서려는 그녀를 부축해 현관으로 들어선다. 매케한 담배연기가 자욱한 집안으로 들어서자 그녀과 한 손으로 코를 막으며 말한다.
“喀儿喀儿~ 这都是什么烟味儿?”(콜록콜록 야~ 너구리 잡냐?)
“你去哪儿了?” (어디 갔었어? 연락도 안되고)
“我把手机扔了,我哪儿都不能去”(핸드폰 버렸어, 이제 내가 갈데가 어디 있겠어?)
“来得正好”(잘 왔어)
그녀는 낮에 공안들의 눈을 피해 거리를 영화관에 숨어 있었다가 밤이 되어 밖에서 서성이다. 갈 곳이 없어 결국 나에게로 돌아왔다.
“我饿了”(나 배고픈데…)
“哦!知道了你稍等”(어 그래 잠시만)
나는 그녀를 위해 된장국을 끓인다.냉장고를 뒤져서 갖은 호박, 대파, 양파, 두부등 갖은 채소를 도마에 올려놓고 적당한 크기로 썰어 냄비에 넣고 된장을 풀어 넣고 숟가락으로 휘저으며 끊인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쳐다본다.
“这就是我梦想的场面呀”(내가 꿈꾸던 장면이야)
“什么?”(뭐가?)
“这样看着为我做菜的对象”(날 위해 요리해주는 남자를 바라보는 거)
나는 정성스레 끓인 된장국을 공기밥과 함께 식탁 위 그녀 앞에 올려놓는다. 그녀는 한참동안 된장국을 바라보다 눈물짓는다.
“你快尝尝”(어서 먹어)
“嗯”(응)
그녀가 숟가락을 들어 국을 떠서 입에 넣는다.
“很好吃,谢谢喜宅”(맛있다, 고마워 희택아)
그녀의 미소지으며 나를 쳐다보지만 양쪽 눈가에선 눈물이 계속 흘러내린다.나는 그녀의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준다.
“对不起 艳艳 因为我”(미안해 옌옌 나 때문에…)
“没事,你要救我而就这么做的嘛”(아냐! 넌 날 구하려고 했던 거잖아)
“…“
“到现在没有一个人会救我这么做,你就是唯一的人,你为了我拼命“(여태껏 그 누구도 날 구해주지 않았어, 네가 유일한 나의 구원자였어, 넌 목숨을 걸고 했던 행동이잖아)
“…”
“所以我也像你一样救你而已“(그래서 나도 널 구한 것 뿐야)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 만큼 고귀한 일은 없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복음15:13]”고 성경에서 말했다. 그녀와 나는 서로를 지켜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며 살인을 저질렀다. 목숨을 내던지며 살인으로 소중한 이를 지킨 사랑도 고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현실에서 용서받지 못한다. 성경 속 말이 진리라면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为什么?不至于那么做的吗(왜 그랬어? 그렇게까진 하지 않아도 됐잖아?)
"那你为什么那么做了?你也不必做那样了 其实我真没想到你会那么做到”(넌 왜 그랬어? 그러지 않아도 됐잖아? 사실 난 네가 그런 행동을 할꺼라 전혀 생각치 못했어)
“你为什么这么想?”(왜 그런 생각을?)
“真抱歉,说实话我看了你笔记本里的日记。你一直把我当作一个妓女是吧,你也以后离开这里就好吗。你究竟来这里的目的就是尽快收拾一切。我也属于其中之一而已,我说对不对?”(미안한데, 나 네 방 노트북에 써놓은 일기장을 훔쳐봤어. 넌 그저 날 몸이나 파는 창녀쯤으로 생각했잖아, 너도 떠나면 그만 이었을 테니까? 네가 여기 온 이유가 정리하고 떠나려 온 것이잖아. 나 또한 그 중 하나일 뿐 일테고, 혹시 내 말이 틀렸니?)
“…”
그녀가 나의 일기를 훔쳐봤다는 말에 화가 났지만, 난 아무말도 할 수가 없다. 그녀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맞다. 그녀를 만나고 사귄 것은 사실 모두 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를 통해 내가 필요한 정보를 얻고 덤으로 그녀와의 육체적인 관계를 통한 욕정을 해소하려 했던 것이다. 나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 돌아가면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고 과거는 내 머릿 속에만 남아 있을 뿐 나의 미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녀와의 만남과 관계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那你为何什么那么做了呢,现在你只剩下回去的事了嘛”(그런데 왜 그랬던 거니?,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었잖아)
나 또한 그런 선택을 하게 될 줄 몰랐다. 철저하게 이성적인 나에게 감성이라는 녀석이 싹트게 한 건 그녀와의 시간이었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고 길었던 시간은 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따뜻한 추억은 이성이 장악한 나의 정신과 마음에 감성의 싹을 틔우고 계속 커져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호텔방에 쓰러져 있던 모습을 봤을 때는 감성이 이성을 죽여버렸다. 나는 순간 이성을 잃어버렸다. 다시 이성이 돌아온 뒤에 남은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두려움이었다.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은 삭막하지만 안전하다. 감성이 지배하는 세상은 따뜻하지만 때론 위험하다. 인간들이 이성적으로 변해가면서 세상은 사랑, 믿음, 소망 같은 것들은 설 자리를 잃고 그 자리는 섹스, 법, 돈으로 대체되어 가는 것 같았다.
“我也不知道我为什么那么做了”(나도 몰라, 내가 왜 그랬는지…)
“你向那猪头下刀的那一瞬间,我就意识到我可能会成为某人的珍贵存在”(난 네가 그 돼지새끼한테 칼을 내리 꽂는 순간, 내가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 고마워 희택)
“那你以后怎么办?”(너 이제 어쩔거야?)
“我终究会被公安抓住去监狱的吧”(뭐 언젠간 공안에게 잡혀 감옥에 가겠지)
“我们一起跑吧”(도망가자)
“怎么跑?”(어떻게?)
“无论如何就跑嘛”(어떻게든)
“你有地方回去,可我再也没有地方可去了,我靠着那猪头像一条狗活下来的,可那条狗咬了主人啊 哈哈哈“(넌 돌아갈 곳이 있지만, 난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그 돼지녀석에게 빌붙어서 개처럼 살아왔어. 근데 그 개가 주인을 물어버렸네 하하하)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지만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모두 어딘가에 붙어있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마치 숙주에 붙어서 생명을 이어가는 기생충 같은 존재이다. 나는 회사, 그녀는 남자라는 숙주만 다를 뿐이다. 숙주가 죽으면 자신도 죽는다. 그녀는 숙주를 죽였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셔츠를 벗긴다. 상처 난 몸과 얼굴에 연고를 발라준다. 그녀는 조용히 잠이 든다. 나는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내가 그녀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 창 밖에는 동이 트고 있다.
동줘 총경리가 죽고난 후 태평양 그룹 본사에서는 양주조선소 총경리를 새로 임명했다. 새로 부임한 총경리는 태평양 그룹 회장의 막내 아들로 얼마 전 UC 버크리 MBA 유학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귀재였다.
그는 양주조선소에 부임한 후 내부 재정상황과 경영 악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본사에 조선소의 구조조정 실시를 주장했다. 그의 경영학적 소양으로 판단했을 때 썩을대로 썩어서 더 이상 회생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양주조선소를 그냥 놔둘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모든 외주 건조물량을 내작으로 돌리고 신조를 중단하고 수리조선소로의 전환을 제안했고 회장 아들의 입김은 그룹 의사결정에 거침없이 반영되었다.
덕분에 합자 회사 해산의 건은 양주조선소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급 물살을 타며 진행되기 시작했다. 태평양 그룹 본사에서 동사회(이사회) 모집 요청이 접수되었다. 우리는 본사에 동사회 모집 건을 알렸고 상해의 태평양그룹 본사에서 회사 해산에 관한 회의가 소집되었다. 한국에서 동사회 멤버인 사장과 해외영업본부장 그리고 실무담당자인 노대리가 참석차 상해를 방문했다.
"오~ 전희택! 잘 지냈어?"
"예~ 대리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생각보다 빨리 정리되는 모양인데! 장총경리님 말로는 네가 고생 많았다고 그러던데"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본사 일행은 사전 미팅을 위해 하루 전날 상해에 도착했다. 시내 한 레스토랑에서 만나 저녁을 함께하며 내일 있을 동사회에 대해 협의 중이다. 노대리(과거 해외영업부 선임)와 잠시 로비에서 따로 얘기 중이다.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설명했고 그는 수고했다며 나의 어깨를 다독여 준다. 이미 동사회 의제는 배포되어 사전 검토가 끝난 상황이고 회사 해산에는 양사가 크게 이견이 없어 보인다. 구체적인 해산 절차만 남은 듯 보인다.
"장총경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러면 추석 전에 들어오시겠는걸요 하하하"
"명절은 고향에서 보내야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사장과 박상무 그리고 장총경리의 입가에 웃음이 끈이지 않는다. 이미 마음은 고향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듯 보인다. 항상 그렇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법이다. 이혼도 절차가 있고 절차 가운데는 양보할 수 없는 이권(利權)들이 걸려있다.
항상 거만하게 목에 힘을 주고 다니던 사장도 드높 하늘로 끝없이 치솟은 태평양 본사 입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모습니다. 기업 오너도 레벨이 다르다. 태평양 그룹은 땅값 높기로 악명 높은 상해의 푸동 상업지구에 빌딩까지 소유할 정도의 거물급 기업이다. 조선뿐만 아니라 해운, 부동산, 자원개발 등 뻗치지 않은 사업이 없을 정도로 전방위적으로 사업을 확장해온 명실상부한 중국 재벌 그룹이다. 우리 같은 한국의 중견 조선업체는 그들에게는 그저 하룻강아지일 뿐이다.
"董事会正式开始"(동사회를 개최합니다!)
양측의 동사가 한자리에 모였다. 각 사가 3명의 동사가 있다. 우리 측의 나머지 동사인 구조물 사업부의 권전무는 현업 업무로 불참하여 위임장을 받아 장총경리가 대리인 참석으로 그 자리를 메웠고, 중방 측은 태평양그룹 부회장, 태평양 조선소 총경리 그리고 양주 조선소 총경리 3명이 참석했다.
양사는 회사 청산에 대한 의견 일치를 확인했고 중국은행에 예치있는 되어 있는 남은 투자금을 이번 달 말까지 똑같이 반반씩 회수해 가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하지만 투자금을 빼기 전에 지급해야 할 비용은 모두 처리해야 한다. 그 말은 회사 비용 즉 직원 급여, 퇴직금 그리고 회사 고정자산, 비품 등도 모두 현금화시켜야 한다.
줄껀 주고 정리할 건 정리해서 투자금을 나눠야 하는 것이다. 중방 측은 이 건에 대해서 이달 말까지 처리되지 않을 시 한국 측에서 최종 처리를 해달라는 입장이다. 그들은 그냥 이번 달 말까지 손 털고 나가겠다는 생각이다.
한국 측 동사 3명은 잠시 별도 협의를 진행하고 그 부분을 떠안고 합의하고 회사 청산에 대한 회의를 종료했다. 사실 회사에서 정리해야 할 직원이라 해봐야 태평양그룹 직원인 부총경리와 류과장을 제외하고 4명밖에 없는 상황이고 그 이외의 집행할 비용은 이번 달 안으로 정리하는 데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인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본사도 우선 빨리 투자금을 한국으로 회수해 가는 것이 급선무이다.
양사 동사들은 빠른 시일 안에 다시 사업을 재개할 수 있길 바란다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합의서에 서명을 하고 마지막 기념 촬영을 한다. 태평양 그룹의 동사들은 또 다른 행사가 있는지 촬영 직후 바로 회의실을 나선다. 간단한 기념 만찬 같은 것도 없다. 기업 생태계는 냉정하다. 실리가 있는 곳에는 간도 쓸개도 내줄 듯이 애걸복걸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피차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나의 중국 생활도 회사와 같이 정리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