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또다시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다. 그녀는 며칠째 먹지 못했는지 얼굴이 핼쑥해져 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我爱您~我不放你走"(전 부장님을 사랑해요~ 이렇게 보내드릴 수 없어요!)
"不是,不要这样"(아니야~ 장주임 이러지 마~ 제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려 간다. 단추가 하나씩 풀어질 때마다 목선 아래의 뽀얀 속살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윽고 깊이 파인 하얀 계곡이 드러난다. 난 일어서서 그녀의 손을 잡아 저지한다.
"住手!"(멈춰!)
"你拥有我吧"(부장님 절 가지세요~)
그녀는 촉촉히 젖은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본다. 여자의 눈물을 바라보고 있을 수 없다. 중추신경이 마비되고 말초신경들이 나를 지배할지도 모른다. 고개를 들어 그녀의 시선을 피해버린다.
"要是你还要这样,就离开我家!"(이럴 거면 내 집에서 나가줘!)
"部长!呜呜呜"(부장님! 흑흑흑)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고 주방으로 뛰어간다. 그리고 싱크대 위 수저통에 같이 놓여있던 식칼을 집어들어 자신의 손목 위에 올려놓는다. 칼날이 손목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조금전까지 애절하던 눈빛은 어느새 살기 어린 눈빛으로 변해있다.
그녀는 쌍방이 합의되지 않은 사랑을 혼자 키워왔고 이뤄지지 않는 사랑은 이제 증오로 변하고 있다. 홀로 키워온 짝사랑은 위험하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대학시절 도서관에서 처음 본 그녀를 기억한다.
건너편 책상에 앉아 책에 시선이 고정된 채 독서에 열중이던 그녀는 긴 생머리가 유난히도 윤기 있게 빛나고 있었다. 그 머릿결이 시선을 따라 수직 하강하며 흘러내려 온다. 그녀는 양손을 목 뒤로 모아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머리 위로 올라간 풍성한 머리칼은 정수리 부근에서 두세 번 꼬아진다. 그녀의 한쪽 손이 책상 위의 볼펜을 집어 똬리를 뜬 머리 중앙으로 꽂아 넣는다. 신기하게도 그 머리는 똬리를 뜬 채로 머리 위 중앙에 자리를 잡는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시선은 책 속을 떠나지 않는다. 순간 드러난 그녀의 새하얀 목선이 도서관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눈부시게 나의 눈 안으로 들어왔다. 난 그 모습을 신기한 듯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후 나는 그녀가 같은 과 동기라는 것을 알게 됐고 그녀 몰래 짝사랑을 키웠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했던 감정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녀의 허락 없이 커져갔고 어느샌가 감정의 크기는 더 이상 가슴속에 가둬둘 수 없을 만큼 커져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운을 끌어모아 용기라는 것을 만들었다. 고백에 필요한 용기를 낸다는 것이 그토록 어렵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몰래 찾아간 그녀의 집 앞 그리고 고백... 그리고 그녀의 대답...
"난 네가 날 좋아하는 줄 몰랐어"
그건 분명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내 몸에서 분출되는 그녀를 향한 사랑의 기운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녀는 아마 자신을 향한 나의 시선과 관심만 즐긴 건지 모른다. 안타깝지만 그녀는 이제 그걸 끊어내야 한다. 나의 고백은 사랑의 시작이 아닌 사랑의 종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누군지 알 수 없는 남자가 있다는 이유를 둘러대며 나는 좋은 친구로만 생각해왔다는 그런 로맨스 영화 속 흔한 거절의 대사를 남기고 등을 보였다.
이후 의식적으로 나를 피하는 그녀의 시선과 행동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고 커져왔던 사랑은 그 크기만큼의 미움으로 변해갔다. 이룰 수 없는 사랑과 같은 공간에 계속 마주치는 건 나에게 너무 힘든 시련이었다. 난 그녀를 잊으려 입대를 결심했다.
그녀의 눈물과 떨림 그리고 증오에 찬 눈빛은 지금 나를 향하고 있다. 그때의 내가 내 앞에 서 있다.
"张主任 别这样!我没想到你会爱我"(이러지 마 장주임! 난 네가 날 사랑하는 줄 몰랐어)
"骗人!"(거짓말!)
순간 그녀는 두 눈을 감는다. 섬뜩한 빛을 내던 날카로운 금속은 그녀의 새하얀 살 속으로 파고들며 미끄러져 내려간다. 선홍빛의 액체가 기다렸다는 듯이 뿜어져 나온다.
"아~안돼~~!"
그녀는 칼자루를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 난 그녀를 손목을 잡아 쉴 새 없이 내어나가는 생명의 액체를 틀어막는다. 다급한 나머지 주변에 지혈할 것을 찾을 새도 없이 티셔츠를 벗어 그녀의 손목을 쪼여매고 그녀를 둘러업고 집 밖으로 뛰어나간다.
"미안해~ 거짓말이야 장주임! 죽으면 안 돼~!"
내 품에 안긴 그녀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좀 전의 증오에 찬 표정은 사라지고 평온한 미소가 번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