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른 새벽 작은 도시의 조용한 역사 앞에서 서서 기차를 기다린다. 잠시 뒤 멀리서 기차가 역사 안으로 들어온다. 열차에 몸을 싣었다.
좌석표를 보며 찾은 자신의 옆자리에는 멀끔히 정장을 차려입은 다른 비즈니스 맨이 앉아 있다. 그도 출장을 가는 모양이다. 많이 피곤했는지 목이 반쯤 꺾인 채 입가에 침까지 흘리며 졸고 있다. 두툼한 목살이 타이트하게 맨 넥타이에 조여있는 모습이 마치 샌드위치 사이에 삐져나온 마요네즈 같다.
청년은 자신 쪽으로 꺾여있는 머리를 유리창 쪽으로 천천히 밀어내고는 자리에 앉는다. 다른 쪽 옆좌석에는 또 다른 중년의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노트북을 펼치고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힐끗 쳐다본 화면에는 복잡한 엑셀 시트가 눈에 들어온다. 보기만 해도 답답하다. 청년은 순간 자신이 사무실에서 보던 복잡한 제품 원가 계산 엑셀 시트가 떠오른다. 청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는 자신이 매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치고 구두도 벗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자신이 좋아하는 재즈 음악을 들으며 가방에서 SF 소설책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
[정말로 우리는 혼자인가? 이 넓은 우주에 정말 우리뿐인가?]
- 김초엽 [스펙트럼] 중에서 -
좀 전에 읽었던 책 속의 문구가 떠오른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본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의 캄캄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올려다본다. 저 별들 중에는 분명 자신과 비슷한 생명체 아니 자신과 똑같은 하지만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가 있을 것만 같다. 끝없이 팽창된 우주는 마치 우리가 수 없이 Ctrl+C로 복제해 놓은 온라인 세계처럼 미래와 과거의 태양계가 수없이 복제되어 뻗어나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반짝이는 저 별들은 모두 과거와 미래의 태양이고 저 근처에는 또 다른 자신이 있을 것만 같다.
'꼬르륵' 소리가 들려온다. 청년은 열차에 오르기 전 역사에서 사두었던 커피와 빵을 먹으며 사색에 잠긴다. 열차 안의 적막과 캄캄한 밤하늘 그리고 기분 좋은 포만감에 취해 졸음이 온다. 단잠에 빠져든다.
"와! 건물들이 으리으리하네"
청년이 서울역 역사 앞에 섰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혼자 서울 출장을 왔다. 새로운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팀장과 함께 출장을 다녔다. 팀장 없이 혼자 다니는 출장이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오고 가는 여정은 자유롭다.
"야! 빨리 안 따라와?"
팀장과 출장을 다닐 때는 그의 발 뒤꿈치만 보고 쫓아다녔다. 어찌나 바삐 움직이는지 그를 놓칠세라 정신없이 땅만 보고 걸었다. 그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청년은 역사 앞에 마련된 흡연장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과 마천루의 풍경들을 쳐다본다. 3시간 남짓한 여행이었지만 남들은 다들 사무실에서 일하는 시간에 누리는 여유라서 인지 야릇한 즐거움이 있다.
역사 앞 카페에 들러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 아웃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그리고 천천히 역사를 벗어나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간다. 지하도에는 출근하는 사람들이 손에 든 작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걷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고 걸어가는 모습이 신기하다. 마치 자율주행차처럼 몸에 센서라도 달린 것일까. 부딪치지 않으며 잘 간다.
서울 지하도
지하도 수십 미터를 걸어가는 동안 청년과 눈이 마주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청년과 시선이 마주친 것이라곤 지하도 천장 곳곳에 설치된 CCTV밖에 없다. 모두가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다. 지하철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하얀 혹은 검은 이어폰과 헤드폰으로 귀를 막고 눈을 아래로 고정한 체 앉아있거나 서 있다. 하지만 드디어 청년과 눈이 마주친 사람을 발견했다.
"엄마! 해가 물 위에 황금길을 만들었어!"
키 작은 꼬마 아이가 창밖을 가리키며 멀리 떠오른 태양과 강물 위에 빛줄기 만든 태양을 보면서 엄마에게 말한다.
"Wow! Look at that! It's so beautiful!" (와우! 저것 좀 봐! 너무 아름답다)
등에 커다란 백팩을 메고 있는 검은 피부를 한 남자와 하얀 피부의 여자는 63 빌딩 사이로 눈부시게 떠오른 태양을 보며 사진을 찍는다. 청년도 멀리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다. 태양빛이 눈 안으로 가득 차 들어오며 동공이 작아지며 눈꺼풀이 내려온다.
청년은 환승을 하기 위해 지하철에서 내렸다. 계단을 오르려 하는데 할머니가 커다란 캐리어 가방을 들고 계단 앞에 서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손에 든 화면만 보며 모른 체 스쳐 지나간다. 충돌방지 센서는 충돌만 피할 뿐 주변 상황에 대한 판단 및 조치에 대한 연산 능력까진 탑재하지 않은 모양이다.
"할머니 제가 들어드릴게요"
"아이고 고마우이 청년!"
청년은 지하도 밖까지 짐을 올려다 드리고 다시 지하도를 내려와 환승할 열차를 기다린다. 출근 시간이 임박한 플랫폼 위에는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지하철이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밀려들어 간다. 다들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 와중에서 손에 들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모두가 지식정보사회에서 단 일분일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청년은 플랫폼 위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다음 열차를 기다린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로 양쪽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고층빌딩들 때문에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지하도를 올라온 청년은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본다. 하늘이 잿빛 빌딩 사이로 유난히도 파랗게 보인다. 옆을 지나던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남성이 청년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하늘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려 한다.
"아~ 아얏!"
아래만 보고 걷다 뻗뻗해진 목 근육이 놀란 모양이다. 그 남자는 한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는 이상한 눈으로 청년을 흘기며 지나간다.
고객사의 건물 앞에서 또다시 담배를 하나 꺼내 피우며 또 지나가는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을 구경한다. 사람들이 잿빛 빌딩 숲으로 서둘러 들어간다. 하얀 담배가 타들어가며 잿빛으로 변해간다. 잿빛 빌딩 사이로 피어오르는 잿빛 연기는 파란 하늘에 닿기도 전에 어디론가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 청년도 고층빌딩으로 입장했다. 사무실 안은 파티션에 가려 검은 머리만 보이는 사람들이 또 고개를 숙인 채 좀 더 커진 화면만 응시하고 있다.
"아놔! 말도 안 되는 소리 할래요 자꾸? 제가 가격 인상은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던 거 같은데"
"고객님, 아니 이 제품은 소재 변형이 심해서 냉각 사이클타임을 더 줘야 합니다. 가격 인상이 불가피해요"
"그걸 제가 어찌 믿어요? 안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요! 저 바쁘니까 이런 얘기하려면 돌아가요!"
청년은 고객을 만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서 고층빌딩을 빠져나왔다. 30분을 위해 4시간을 여행했다. 하지만 청년은 4시간을 위해 30분을 희생한 것 같다. 또다시 4시간의 여행이 남았다.
청년은 그늘진 마천루 사이를 파란 하늘을 보며 천천히 걸어간다. 해가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정오가 아니면 해를 볼 수 없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린다. 주변에 맛집을 검색해 허기진 배를 채웠다. 아직 점심시간이 되지 않은 식당은 크게 붐비지 않는다. 그는 번화가의 한 서점에 들렀다. 눈길을 끄는 책들을 따라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펼친 책장에서 가슴에 와닿는 문구를 만났다.
"평범한 회사원? 그런 인물은 없어.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에서 -
청년은 자신이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지 않은 듯하다. 모두가 일하는 시간에 이렇게 서점에서 한가로이 책을 보고 있는 회사원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 청년은 책을 한 권 사고 서점을 나섰다.
청년은 다시 열차에 올랐다. 음악을 들으며 다시 서점에서 산 책을 읽으며 달리는 도서관에서의 시간을 즐긴다.
"야! 너 왜 어제 회사로 복귀 안 했어?"
"출장 갔다가 바로 퇴근했는데요"
"너 어제 고객사에서 30분 회의하고 나왔다며"
"네..."
"그리고 어딜 갔어?"
"밥 먹고 잠시 거기 있다가 내려왔는데요"
"너 아침 첫차 타고 갔으면 7시 20분이고 서울 올라가는데 2시간 40분, 서울역에서 사당역까지 17분, 환승하고 역삼역까지 12분, 역에서 고객사는 코 앞이니 걷는 시간 다 해봐야 40분이면 충분한데. 30분 회의하고 나왔으면 기껏해야 11시 반쯤 점심 먹고 내려온다고 해도 늦어도 4시면 회사에 도착할 수 있는데 바로 퇴근한다는 게 말이 돼?"
"..."
"그리고 가격인상 건은?"
"그게 잘..."
"야! 밥값 좀 하자, 넌 월급 받기 부끄럽지도 않냐?"
"..."
팀장의 책상 앞에 고개를 숙인 청년은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그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그가 하는 계산적이고 논리적인 말에서 이미 감지했다.
청년은 또다시 출장길에 올랐다.
청년은 열차에 오르자마자 책이 아닌 노트북을 펼치고 복잡한 엑셀 시트를 들여다 본다. 열차에서 내리고 곧장 지하철로 향했다. 핸드폰으로 열차시간을 확인하고 열차를 놓칠세라 땅만 보며 뛰듯이 걸었다. 그리고 터져나가는 지하철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었다. 그리고 지하도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곧장 고층 빌딩으로 들어갔다. 고객과 열띤 협상을 펼쳤다. 며칠 밤을 야근을 하며 치밀하게 계산하고 예상하며 빈틈없이 준비했다. 고객이 'NO' 할 수 없게 준비했다. 결국 원하는 가격을 받아냈다. 다시 고층빌딩을 나섰다. 열차시간에 맞추려 또다시 한 눈 팔지 않고 걸었다. 역사에서 김밥과 우유를 사서 열차에 앉아 먹었다. 그리고 순간 긴장이 풀렸다. 급 피로가 몰려온다. 청년은 목이 꺾인 채 침을 흘리며 잠들었다.
그리고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청년은 다시 그렇게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표지 그림 출처]
Rush Hour’ sculpture by George Segal in Finsbury Avenue Square, Broadgate, City of Lond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