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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Oct 22. 2021

착한 사람

산수유나무가 앙증맞은 꽃망울들을 터트리며 나의 봄은 시작되었다. 겨울을 이겨낸 가녀린 나뭇가지에도 진달래 꽃봉오리가 맺히더니 어여쁜 진홍빛 꽃잎을 틔워냈다. 경계는 없었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오는 게 아니었다. 이쪽에는 바싹 마른 단풍잎들이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이따금 불어오는 냉랭한 바람에 파르르 몸을 떨며 마지막 겨울을 살아내고 있었고, 저쪽에는 겨울의 잔해를 털어버리듯 조금씩 봄의 빛깔이 움트고 있었다. 그렇게 봄의 따스함은 조그맣게 움터 조금씩 조금씩 겨울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개나리가 노란 물결을 뽐내고 매화나무에는 손가락 끝에 봉숭아 물을 들인 듯한 하얀 꽃이 피어나고 밤을 밝히는 등불 같은 목련꽃이 탐스럽게 열리며 가녀린 벚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하면 완연한 봄을 찬양하는 라일락 향기에 흠뻑 취하게 된다.

잘 가꾸어진 화단에는 초록 잎사귀가 먼저 주인 노릇을 하다가 피어나곤 하는 하양, 빨강, 진분홍 철쭉꽃들의 무리들이 봄의 향연에 동참한다. 진달래를 닮았지만 전혀 다른 자태. 가느다란 가지에 꽃부터 수줍게 피어나는 진달래의 품격은 진정 봄의 전령사답고 무리무리 소담하게 피어 개나리의 노란빛에 하나의 빛깔을 더해 산을 아름답게 채색한다. 나는 이런 봄을 사랑하였다. 따스한 햇살 사이로 시원한 바람 한 자락이 길을 내어주며 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가 금세 실증 나서 돌아서는 바람에게서 햇빛 냄새와 나무 냄새와 꽃 냄새가 났다. 바람은 봄을 퍼트리는 전령사처럼 이리로 불었다가 저리로 불어 사라지고 또다시 불어와 상쾌한 바람을 훅 던지고 사라졌다. 도시 속에 살면서 인공적인 자연에 길들여진 나는 이런 어여쁜 자연을 바라볼 때면 착하다는 생각을 했고 내 마음도 조금은 착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뒷산에 오르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마냥 세속의 때를 씻었다. 좋지 않은 생각들과 해서는 안 되는 생각들, 불필요한 불안과 걱정들, 산은 늘 거기에 있었고 내가 가기만 하면 되었다. 산은 나를 거부하지 않았고, 언제든지 나를 안아주었다. 산속의 고요함으로 인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느껴졌지만, 산은 끊임없이 경계를 허물며 다음 시간과 다음 시간으로 나를 인도해 주었다. 늘 불안 때문에 멈추곤 하는 나와 달리 산은 성실하고 끈기 있고 용감하게 다른 하루의 고요로 묵묵히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연이 그렇게 크게 느껴진 건 재작년 겨울부터 우리를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둔 유례없는 바이러스 덕분이었다. 한 달이면 끝나겠지, 두 달이면 괜찮겠지, 공포와 두려움에 숨죽이며 지내던 사람들은 결국 외로움에 못 이겨 밖으로 뛰쳐나갔고 인공 벽에 둘러싸인 카페와 음식점의 울타리 대신 광활한 자연을 선택했다. 자연만이 유일한 기댈 곳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의 현장이 다시금 펼쳐지고 있는 것 같았다. 금지가 많아지던 시기, 사람들은 소통하지 못함을 가장 힘들어했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음을, 기약 없는 약속의 연장을 한숨 섞인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미루지 말고 진작에 많이 만나고 다닐걸'하는 사람들의 후회 섞인 생각들은 공통적이었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외출도 자제하며 겨울을 보내고 햇살이 조금씩 따스해지던 작년 어느 봄날, 그동안 풀지 못한 답답함을 해소하려고 오르던 뒷산 등산길에서 나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사람들이 떼 지어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 둘셋 정도 모여 그동안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모습. 일순, 나는 '뒷산이 인기 명소가 되었네' 하는 생각을 했다. 높지도 않고 얕은 산이었고 언제든지 오를 수 있는 산이여서 그랬는지 평소 드문드문 사람들이 오르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여들던 곳은 아니었다.

나는 정상에 올라서서 확 트인 자연경관을 마주했고 따스한 햇살에 데워진 바위에 걸터앉아 돌의 온기를 오래도록 즐겼다. '산은 묵묵히 늘 이곳에 서 있었는데, 바뀐 것은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산이 거대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산이 나를 꼭 안아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늘 여기에 같은 자리에 있어. 너만 좋다면 언제든지 찾아와. 내 품은 넓어서 누구든 품어줄 수 있어. 바람이 늘 쓸어주는 바위는 깨끗해서 닦을 필요도 없지. 날씨에 따라 변하는 하늘은 얼마나 넓은지 나를 품고도 남을 정도지.'

산이 이렇게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나는 문득 산의 미소 짓는 얼굴을 본 듯했고 내가 앉은 바위가 산의 코쯤 어디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자연은 참 착하구나.'

자연은 착하다는 생각을 하며 착한 사람을 떠올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왜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 사람이었을까? 아마도 나는 그 사람에게 평생 고마움을 갚을 수 없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드는 고마움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떠올렸을까? 얼마 전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보며 다시금 1997년 우리가 겪었던 IMF사태를 떠올렸었다. 외환보유고가 부족해져서 구제금융을 받을 수밖에 없던 시기에 난 취업난을 겪었고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회사에서도 일 년을 조금 넘게 다니고 나와야 했다. 착한 사람은 그때 관리부서의 과장님이었다. 몇 개월째 월급을 받지 못한 채 하나 둘 일터를 떠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때 무엇을 믿고 무급으로 회사를 다녔는지 알 수 없다. 과장님은 늘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을 했다. 그것이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고 세 달이 되어 갔다. 그 말을 믿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힘들게 들어온 회사를 그만둘 자신이 없었고, 또다시 이력서를 보내고 합격 발표를 기다리는 지루하고 불안한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월급을 세 달째 받지 못하던 어느 날, 과장님은 여직원과 함께 회의실 문을 잠그고 들어가셨다. 우리는 직감으로 무슨 일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두 시간이 넘도록 문은 열리지 않았고 영문도 모르는 우리는 회사에 위기가 찾아왔음을 즉감 하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회의실 문이 활짝 열렸을 때 과장님 손에는 봉투들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익숙해 보이는 월급봉투 다발이었다. 요즘은 통장에 찍히는 숫자들이 일한 대가로 당연히 인식되는 시대지만 그때는 봉투로 월급을 주는 회사들도 간혹 있었던 때였다. 과장님은 직원들 이름을 호명하며 그동안 밀린 월급봉투를 건네기 시작했다. 나는 못 받으리라 포기하고 있던 월급봉투를 손에 들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무엇을 믿고 기다렸던 것도 아니었고 어떤 대책이 있어서 머물러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과장님은 다크호스처럼 나타나 우리의 밀린 월급들을 모두 해결해 주었다. 나중에서야 나는 회사로 들어올 마지막 자금이 있었는데 그 자금이 들어오자마자 과장님이 우리 월급부터 해결해 주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 길로 또다시 무직 상태가 되었다. 또다시 수많은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았다. 살아남기 위해 정신없이 살던 시기였던지라 누군가를 떠올릴 새도 없이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그리고 그 과장님은 내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잊혔던 것이다. 자연은 참 착하다는 생각을 하며 과장님을 떠올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과장님의 멋진 용기를 이제 와서야 새삼 고맙다고 느꼈고 그 시절 과장님께 고마움을 전하지 못한 것이 미안함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 당시 나는 커다란 것을 받았음에도 받았다고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거저 받은 행운 정도로만 여겼었다. 운이 좋았네, 정도였던 것이다. 왜 이제야 몇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고마움이 물밀듯이 밀려오는지……. 그러니 삶은 살아봐야 알 일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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