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이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 소설 데미안 -
새가 알에서 나오려면 알을 깨기까지의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고 지속적인 고통이 따른다. 말이 인내와 고통이지 그것을 참고 이겨내는 과정은 말 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중간에 지쳐 포기할 수도 있는데 이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왜냐면 이 행동의 전제는 자신이 알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인데 , 이 사실을 인지하는게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후에는 알을 깨고 나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의지를 가지는게 어려운 이유는 어떻게 생각하면 새 입장에선 알 속이 안전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굳이 내가 왜 힘들게 알을 깨고 나가야하는지, 알을 깨야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알을 깨려는 의지가 생기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다.
새가 알 속에 같혀 있다면 알 바깥 세상에 대해 알기 힘들고, 다른 사람이 바깥 세상에 대해 말해줘도 믿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알) 기준으론 말이 안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럴때마다 알 속의 새는 이렇게 말한다. "대화가 안통한다"라고. 그 후, 말이 안통하는 사람과의 대화 따위는 그만두고 본인과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찾는데 그렇게 찾은 사람들은 본인과 비슷한 유형의 알에 갖혀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는 서로 즐겁게 대화를 나눈다.
만약 자신이 알에 갖혀 있다는 사실만 인지해도 이미 알을 절반 정도는 깬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 내가 알에 갖혀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개인적인 생각으론 '다양한 경험'으로 알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늘 하던 일을 하고, 늘 하던 공부, 늘 만나는 사람을 만나서는 알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자기 주변을 둘러써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알에 갖혀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만약 알을 깨려는 의지를 가지고 노력했다면 알을 깼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도 확신하진 못하지만 전에는 말이 안통한다고 생각했던 집단 혹은 사람과 대화가 어느정도 통하기 시작한다면 조금은 깬 것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혹은 알을 깨고 나오기 이전에 친했던 집단 혹은 사람들과 다시 대화를 해보면 느겨지는게 있지 않을까.
새는 알껍질을 한 번만 깨고 나오면 되지만, 인간은 무수히 많은 껍질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힘들게 첫 껍질을 깨고 나서 비로소 넓은 세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또다른 껍질이 날 감싸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른채 내가 껍질을 깨고 보는 이 광경이 세계의 전부라고 또다시 착각한다. 또 다른 껍질이 날 가두고 있다는 생각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에 있어서 껍질을 깨는 횟수만큼 내가 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것이 아닐까. 파괴는 곧 창조다.
껍질을 깨는 데는 고통이 따른다. 본인이 깨고 싶은 껍질의 수만큼 더 큰 고통이 따를 것이다. 그렇게 힘든데 왜 계속 알을 깨려할까. 그건 수많은 고통에도 계속해서 알을 깸으로써 알을 깨고 나와서 새로운 세상이 보여주는 놀라운 광경이 보고 싶어서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