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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은 May 01. 2023

교실의 성역할


2학년 승준이가 밥을 먹다 말고 나한테 말한다.

“선생님, 전 모솔이에요.”

그래. 그럴 수 있지. 여기 모솔 아닌 애들이 별로 없을 텐데. 내가 알기로 여기서 1학년 희연이만이 남자친구 두 명과 사귀고 있다.

“근데 제가 좋아하는 애가 있거든요. 걔도 저를 좋아할까요?”

승준이가 좋아하는 아이가 누군지는 뻔하다. 승준이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넌시지(그러나 내게는 뻔하게) 알려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2학년 윤지다. 윤지는 윤호 동생이고 4학년 윤호는 연계형 교실에 다니고 있다. 윤지는 분홍 안경을 쓰고 책을 자주 읽는다. 말할 때면 아주 빠르게 말하는데 윤호랑 말투가 똑같다(남매는 이런 게 닮는건가?). 윤지가 승준이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성가셔하는 느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승준이는 좋아하는 여자면 장난을 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파다.

“승준이가 그 애한테 잘해주면 그 애도 너를 좋아할 거야.”

“잘 해주는데. 어떻게 잘 해줘요?”


남자아이는 좋아하는 여자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건 저학년 때 배워야 하는 중요 기술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1학년 때 서로 웃고 떠들고 함께 놀던 아이들이 2학년이 되자마자 너는 여자니 남자니 하면서 서로의 성역할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선생님들도 여기 한 몫한다. 

아이브레인 시간에 담당 선생님은 토끼 그림과 악어 그림 두 종류를 복사해 왔다. 여자 아이는 토끼 그림, 남자아이는 악어 그림을 가져가라고 했다. 아이들은 하나씩 그림을 가져갔다. 예은이는 악어 그림을 가져가려 했다. 그러자 옆에서 시원이가 말했다.

“넌 여자애가 왜 악어 그림 가져가?”

“여자아이는 토끼 그림 가져가세요~” 

선생님이 말했다. 예은이가 굳이 악어 그림을 그리겠다고 한다면 선생님도 막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은이는 거기서 그만두고 토끼 그림을 가져갔다. 


아이브레인 시간이 끝나고 돌봄 2반에 갔다. 송우와 민지, 채은이가 놀고 있었다. 2학년 송우는 여자 아이들과 친하다. 여자아이들과 사이좋게 노는 남자아이는 2학년부터 극히 드물어진다. 송우는 민지가 가져온 분홍 머리띠를 썼다. 독서 시간 내내 송우는 그 머리띠를 쓰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넌 여자애야? 왜 그런 걸 쓰고 있어?” 담당 선생님이 송우를 보더니 말했다. 송우는 머리띠를 조금 더 쓰고 있다 이내 벗었다. 송우는 언제까지 여자아이들과 사이 좋게 노는 2학년 남자아이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놀이 시간, 2학년 현지가 블록을 가져와 열심히 집을 만들고 있다. 상당히 크고 높다. 현지는 늘 블록 만드는 걸 좋아하고 튼튼하게 잘 만드는 걸로 보아 건축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 

“현지야. 집 멋지다. 나중에 커서 건축가 해도 되겠다.”

내가 말했다. 현지는 노란 블록으로 지붕을 덮으며 말했다.

“건축가는 남자만 하는 거 아니에요? 여자도 건축가 할 수 있어요?”

“당연히 할 수 있지.”

현지에겐 토끼 그림보다는 악어 그림이 더 잘 어울린다. 그런 현지는 아이브레인 시간에 어느 그림을 그렸을까?


옆에서 요란스런 소리가 들린다. 민혁이와 호원이와 태훈이 3인방이 놀고 있다. 선생님이 자신들을 버거워한다는 걸 알기에 이 세 명은 신나게 떠들고 있다. 이번에는 승준이도 끼어있다. 승준이는 열심히 3인방 무리에 들고 싶어한다. 선생님을 골치아프게 하고 교실을 왁자지껄 뛰어다니는 반항적인 무리는 어린이들의 눈에 멋지게 보일테니 놀라운 일은 아니다. 


가만 보니 남자 아이 네 명은 자기들끼리 놀고 있는 게 아니었다. 가운데 윤지가 있다. 처음에는 윤지와 같이 노는 듯 보였던 아이들이 어느새 윤지를 가운데 두고 눈을 감게 한 뒤 술래잡기 비슷한 걸 하고 있었다. 윤지 안경은 호원이가 들고 있다. 윤지가 허우적 거리는 동안 남자 아이들이 윤지 팔을 치고 등을 치고 좋다고 깔깔 웃었다. 여자 아이 하나를 둘러싸고 남자애들이 그 애를 손으로 때리며 비웃는 건 전혀 좋은 풍경이 아니다. 네 명은 자기가 윤지와 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윤지는 하지 말라고 힘없이 손을 흔들면서도 규칙대로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이런 식이 남자 아이들과 노는 라고 윤지가 배우면 안될텐데.


난 담당 선생님이 말릴 거라고 생각했다. 소리도 컸고 오전반인 담당 선생님은 늘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아이들을 지도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윤지와 남자아이들을 슬쩍 보더니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도 저게 노는 게 아니라 괴롭히라는 걸 모르나? 장난인 척 하면서 여자애 괴롭히기. 저 유구한 현상은 어떻게 하나도 안 변하고 지금도 이어지나. 물론 남자아이들은 자기들이 재밌게 놀고 있는 거라 생각할 것이다. 


윤지가 먼저 화낼 일은 없을 것 같고, 결국 내가 현지 옆에서 일어나 네 명에게 갔다. 

“그만해! 윤지가 하지 말라고 하잖아. 왜 윤지를 괴롭혀. 당사자가 싫다고 하면 하는 거 아니야.”

난 태훈이한테서 윤지 안경을 가져왔다. 윤지는 눈을 떴고 놀이는 끝났다. 3인방은 김 빠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난 승준이 얼굴의 어리둥절하고 실망한 표정을 보고 똑같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잘 해주는 게 아니야. 네가 윤지를 보고 웃는다고 해서 잘해주는 게 아니고, 대체 승준이가 좋아하는 건 뭔지, 여자아이를 좋아한다는 게 왜 이런 장난에 동조하는 게 되는건지 묻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승준이는 다른 애들처럼 나도 했을 뿐인데 뭐가 잘못인지 정말 모르는 얼굴이었다. 담당 선생님은 전부 보았음에도 말이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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