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구나무 선 철학

by 신성규

우리는 지구 위에 서 있다고 믿는다.

발은 단단한 땅을 딛고 있고,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거대한 행성 위에서

물구나무를 선 채 매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중력은 방향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위’와 ‘아래’는 단지 인간의 관습일 뿐이다.

철학은 이런 ‘당연함’을 부수는 일이다.


나는 철학을 속을 파는 행위라 생각한다.

겉껍질을 벗기고, 깊숙이 내려가며,

무엇이 그 속을 지탱하는지 찾는다.

그러나 내려가기만 해서는 충분치 않다.

언젠가 다시 올라와야 한다.

손에 쥔 것을 세상과 나누고,

또 다른 사유의 건축물을 세워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두 개의 상반된 모드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하나는 ‘자폐적 몰입’이다.

세부에 매달리고, 패턴을 추적하고,

작은 규칙의 기원을 찾아가는 집요함.

다른 하나는 ‘조현병적 발산’이다.

서로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점들을

뜻밖의 방식으로 연결하고,

질서를 해체해 새로운 문법을 만든다.


과학적 창조성도 이 두 흐름 위에 선다.

과학자는 수렴적 사고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발산적 사고로 가설을 세운다.

하나는 깊이 파고드는 ‘망원경’이고,

다른 하나는 경계를 초월하는 ‘현미경’이다.

뉴턴은 사과의 낙하를 보며 중력을 수렴했고,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를 상상으로 발산했다.

창조는 이 두 가지가 마찰하며 불꽃을 내는 순간에 탄생한다.


그렇다면 이런 물구나무 선 철학,

깊게 내려갔다가 무모하게 뻗어가는 사고는

정상인들의 눈엔 바보 같을까?

어쩌면 그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정된 지평 위에서

‘제자리에 선 채’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나는 그 경계 밖에서,

뒤집힌 시선과 뒤틀린 궤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왜냐하면, 창조는 언제나 정상에서 조금 비켜선 곳에서

조용히 싹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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